Sunday, November 02, 2014

피츠버그의 맛집

이 글은 1년 전 APS DFD를 위해 피츠버그에 방문하던 때부터 생각하던 글이다.

피츠버그에 도착하면서 룸메이트였던 용진이가 공항에서 라이드를 해줬는데, 저녁 약속을 잡으면서 가보고 싶은 음식점이 있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그곳이 어딘지 궁금해했다. 피츠버그에 6+년간 살았는데 오랜만에 방문에서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 어디인지 궁금하다는 것이다. 그런 관심이 이해가 되어, 피츠버그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들에 대해 적어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음식점 관련 글인 만큼 시점에 따라 자주 바뀔 수 있어서 너무 늦은 포스팅이 옳은가 하는 생각도 든다만 그래도 한번 써보려고 한다. 주소는 굳이 찾아보기는 귀찮으니 길 이름 정도로만...

1. Kaya Restaurant
Smallman St
이곳은 명백히 피츠버그에서 가장 독창적인 요리를 하는 곳이다. MadMex, Soba, Casbah 등을 운영하는 Big burrito의 식당이며, 퓨전을 추구하지만 지나치게 괴랄하지 않고, 보수적인 입맛을 배반하지 않는다. Strip distric의 Penn Ave보다 한블럭 더 더 강 쪽으로 들어가므로 그다지 찾기 쉽다고는 할 수 없지만 피츠버그에 장기 거주한다면 한번쯤은 꼭 가보기를 추천하는 곳.
이번에 다시 가보니 예전보다는 다소 아이덴티티가 강해진 듯.

2. Schenley Park Cafe
Schenley Dr.
이곳은 Schenley park 입구 중 Phipps conservatory 쪽에 있는 작은 건물이다. Park office로 사용되기 때문에 흔이 이곳에서 음식을 판다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으나, 간단한 음식과 커피를 판다. 어떻게 보면 음식이 굉장히 맛있는 곳은 아니지만 Schenley park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기 때문에 이른 아침에 가볼만 하다. 맛보다는 경치로 가는 곳이긴 하지만 Quiche는 먹을 만 하다. 이번에 가보니 서버가 남자로 바뀐게 에러...

3. La Feria
Walnut St.
Pamela 위에 있는 곳으로 페루 음식을 판다고 주장하는 곳이다. 하지만 내가 만난 페루인 중 누구도 그곳을 페루 음식점이라고 생각하진 않는 듯 했다. 그냥 밥집이라고 생각하면 편하고, 매일 그날의 special이 있는데 11불에 먹을 수 있다. 요리를 고르면 보통 샐러드와 밥과 함께 나온다. Special 메뉴가 항상 믿을 만 하기 때문에 메뉴를 고르지 않아도 되는 장점이 있으며, 그래서인지 내가 즐겨 갔었다. 이번에 가보니 여전히 맛있었다.

4. Red Oak Cafe
Forbes Ave.
핏대 스타벅스 옆으로 있는 집인데 La Feria 비슷하게 매일 매일 그 날의 메뉴가 있다. 역시 믿을만한 집. 하지만 이번에 가보지 못해서 아쉬웠다.

5. Salonika's
Sixth St.
그리스식 gyro를 파는 곳이다. 저렴한 가격에 사워 크림도 듬뿍 넣어준다. 인근에 있는 하인즈 홀을 갈 때마다 갔던 곳인데 이번엔 호텔이 바로 옆임에도 불구하고 못갔다. 일요일날 문을 닫을 줄이야...

6. Uncle Sam's Submarines
Multiple locations
피츠버그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듯.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7. The Point Brugge Cafe
Reynolds Ave.
벨기에 음식점. 맛으로만 따지면 피츠버그 베스트 3에 들어갈 거 같은데 가격이 다소 비싸다. 아마 피츠버그에 조금 있었다는 사람들은 한두번 다 가본 적이 있을 듯.

8. Piccolo Forno
Bulter St.
아마도 피츠버그에서 유일한 정통 이탈리안 음식점일 듯. 역시 가격이 꽤 비싸다. 피츠버그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대부분 미국식 이탈리안인데(심지어 italian town에도 정통 레스토랑이 없다), 이곳은 가장 덜 americanized된 곳으로 생각되고, 맛도 괜찮다. 다만 제 시간에 앉으려면 예약이 필수다.

9. Tram's Kitchen
Main St.
제대로 된 pho를 파는 곳이다. 미국 어느곳을 가도 이곳 만큼 깊이있는 맛을 내는 육수에 포를 파는 곳은 못봤다. 베트남 친구도 좋아했고, 특히 스프링롤도 좋다..

10. Sun Penang
Forbes Ave
동남아를 표방한 다소 퓨전 스타일의 레스토랑인데 추천할 만 하다.

IK

PS. 지금 내가 피츠버그 공항에서 막 내린다면, 일단 라 페리아를 가겠다. 이곳은 나한테 모든 요소를 제외하고 피츠버그의 1순위 집인데. 혼자서 가장 외롭고 힘들던 시절의 기억이 그대로 서려있는 곳이다. 피츠버그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먹은 음식점이기도 하며, 마지막으로 나올 때 팁을 50불인가를 주고 나왔었다.

Sunday, October 26, 2014

My academic genealogy

I recently got a chance to look up my academic heritage, or in other name, "academic genealogy". Here's my findings.

Dr. Ildoo Kim got his Ph.D. in 2011 at the University of Pittsburgh, under a supervision of
Dr. Xiao-Lun Wu, who got his Ph.D. in 1988 at Cornell University, under a supervision of
Dr. Carl P. Franck, who got his PhD in 1978 at Princeton, under a supervision of
Dr. Steve E. Schnatterly, who got his PhD in 1965 at UIUC, under a supervision of
Dr. Charles P. Slichter, who got his PhD in 1949 at Harvard, under a supervision of
Dr. Edward Purcell, who got his PhD at Harvard and a Nobel laureate, under a supervision of
Dr. Kennith Bainbridge, who got his PhD at Princeton, under a supervision of
Dr. Henry D. Smyth, who got his PhD in 1921 at Princeton, under a supervision of
~(Dr. Smyth has the 2nd phd, received in 1923 at Cambridge, under a supervision of Dr. Ernest Rutherford, who is a Nobel laureate.)
Dr. Karl T. Compton, who got his PhD in 1912 at Princeton, under a supervision of
Dr. Owen W. Richardson, who got his PhD at Cambridge, UK, under a supervision of
Dr. J. J. Thomson, who got his PhD at Cambridge, under a supervision of
Dr. John William Strutt or Lord Rayliegh, who got his PhD at Cambridge, under a supervision of
Dr. E. J. Routh, Cambridge, under a supervision of
Dr. William Hopkins, Cambridge, under
Adam Sedgwick, Cambridge, under
Thomas Jones, Cambridge, under
Thomas Postlethwaite, Cambridge, MA 1756, under
Stephen Whisson, Cambridge, MA 1742, under
Walter Taylor, Cambridge, MA 1723, under
Robert Smith, Cambridge, MA 1715, under
Roger Cotes, Cambridge, MA 1706, under
Issac Newton, Cambridge, MA 1668, under (yes, that Issac Newton)
Isaac Barrow, Cambridge, MA 1652, under
Vinceno Viviani, educated in 1642 at Universita di Pisa, under
Galileo Galilei, educated in 1585 at Pisa under
Ostilio Ricci, at Universita di Brescia under
Nicolo Fontana Tartaglia

MA(Barrow to Postlethwaite) does not mean Massachusetts. It means the Masters degree, which once was the most advanced academic degree. Surely, the degree does not mean much here.

IK

PS. I finished this article on 12/28/2011, but it took almost three years to complete linking external links. I am 24th student of Galileo Galilei, who died exactly 340 years ago my birthday.

Sunday, February 23, 2014

3년 묵은 이야기

2010년 말, 나는 지쳐있었다.


박사공부를 하는 누구나 그렇겠지만, 아니면 내가 유난히 그랬을지도 모르겠는데 졸업 즈음에 나는 정신적으로 매우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광학, 고체를 거쳐 유체를 공부하고 있었고, 이는 내가 물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예상했던 혹은 원했던 계획에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2002년에 대학원을 시작했고, 고체분광학에서 2년, 산화물반도체에서 2년을 지내고 2007년에 본격적으로 유체물리를 시작했다. 석사과정 지도교수님이셨던 김재훈교수님의 통계열역학 강의에 흥미를 느껴 그분의 석사과정 제자가 되었고, 피츠버그에 와서는 양자컴퓨터를 한다고 꽤 유명한 J. Levy의 학생이 되었으나, 여러 사정(주로 펀딩)으로 인하여 과에서 학생 부려먹기로 유명했던 Dr. Wu의 제자가 되었다.

Dr. Wu는 내가 처음 연구실에 출근하던 날 이런 얘기를 했다. "나는 학생이 교수보다는 열심히 공부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당연한 이야기라고, 당연히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그렇게 힘든 일인지 몰랐다. 어쩌면 이게 힘들다는 것은 2002년 대학원 생활을 시작하면서 알았어야 했는데, 내가 늦게 알았다. 지도교수였던 XL Wu는 매일 아침 10시에 연구실에 불을 켜고 대충 라면 뽀글이나 세미나 피자, 혹은 빵한조각으로 점심을 때우고, 새벽 1시에 퇴근하는 생활을 1년에 350일 정도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진정으로 물리를 즐겼다. 현상에 흥미를 느끼고,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하는 일을 좋아했다. 지난 11월에 갔을 때 나이 50이 넘어서도 직접 pipet을 잡고 직접 컬쳐를 하고 있었다. Biophysics에 대한 그의 열정이다.

그가 좋았던 점은, 학생한테 높은 기준을 적용하는 만큼, 학생을 배려한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는 항상 학생때 열심히 공부하고 어서 졸업하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정 나를 위해, 다소 거친 언어로, 조언을 해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University of Pittsburgh의 물리학과에는 규칙이 있다. 매년 커미티 미팅을 해야하며, 각 미팅이 1년 이상 떨어질 수가 없다. 2009년 8월에 중간미팅을 했던 나는 2010년 9월이 되자 더 이상 다음 미팅을 미룰 수가 없었다. 군대로 인한 나의 미국 체류 시효는 2010년 12월로 끝나기 때문에 나는 당시 학기 내로는 무조건 디펜스를 해야 했었고, 2010년 9월이 디펜스를 하는 미팅이 되길 바랬다. 하지만 그 때 미팅의 결과는 참담했다. 커미티를 구성하는 교수님들은 나의 학위취득을 반대하고 있었고, 특히 두 명 정도는 심하게 반대를 했다.

나의 co-advisor 격이던 Dr. WI Goldburg교수님은 그 즈음에 나한테 조언을 해줬다. 커미티는 만장일치제가 아니다. 아마 한 명의 반대의견은 무시될 것이다. 하지만 두 명의 반대는 극복되기 힘들 것이다. 남은 3개월간 나는 최소한 한 명으로부터 내 연구의 건실성을 인정받아야했다.

추가적으로 할 일이 생겼고, 밤을 새고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연구실에서 밤을 새고 학교 앞의 베이글집에서 치킨브레스트 샐러드를 먹거나 BLT 샌드위치를 먹는 일이 일상적이 되었다. 아마 내 삶에서 가장 힘든 시기가 이때가 아니었나 싶다.

다행히 연구적인 면에서는 실마리는 다소 풀려갔지만 여전히 졸업하고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우연히 아버지께서 조선일보에 실린 국방과학연구소 직원모집 공고를 보고 이야기를 해주셨다. 가장 정신없던 시기에 가장 성의없이 일단 지원서를 냈다. 면접도 정신없이 했고, 다행히 오퍼가 왔다. 비슷한 시기에 서울대학교 기계공학과의 최해천 교수의 연구실과 삼성 종합기술원에도 이야기가 오갔으나 결정적으로 전문연구요원 T/O가 없어서 내가 가기는 어려운 자리였다.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끊이지는 않고 있었는데 일단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오퍼가 오고 나서 모두 흐지부지 되었다.

만약 국과연에서 오퍼가 오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 정부 시책에 따라 전문연구요원 오퍼는 거의 씨가 마르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국과연 오퍼가 없었다면 다소 힘들었을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대부분 물리학과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는, 나에게는 말 그대로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 연구소에 가기로 결정한 것은, 무엇보다 내가 학교 생활에 너무 지쳐있었기 때문이었고, 당시로서는 더이상 학교에서 연구하는 것이 즐겁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어떠한 보람도 찾을 수 없었다.

국과연 오퍼를 받고, 논문 최종본도 모든 커미티에 송부를 하고 나서 디펜스 날짜를 기다리다가 기회가 되어 DFD를 갈 수 있었다. DFD는 APS, 즉 미국 물리학회의 유체물리 분과에서 주최하는 학회를 말하는 것인데, 매년 11월 추수감사절 직전에 개최된다. 미국 물리학계에서는 주로 3월 총회에서 유체를 많이 다루곤 했었는데 2000년대 들어서 점차 11월에 있는 분과회의로 그 중심이 옮겨가는 추세였다. 나도 2010년까지는 3월 총회만 몇차례 가다가 2010년 11월에 한번 DFD를 가보자는 생각이 들어 갔었다. 그때 어느 한국 학생의 발표에 들어갔는데, 발표의 퀄리티에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 영어 실력이나 프리젠테이션의 정도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해당 학생은 자신이 공부하는 토픽에 대해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국 학생들 몇몇에 대한 인상이 대개 그러하였는데, 아무래도 한국 학생의 이해력의 문제라기보다는 전투적이지 않은 대학원 환경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닌 적이 있긴 하기 때문에 한국의 분위기를 대략 알고 있는데, 확실히 미국처럼 지도교수와 공격적인 토론을 통해 자신의 퀄리티를 연마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고, 또한 미국 학교보다는 훨씬 더 실적에 대한 압박감 없이 설렁설렁한 분위기에서 연구를 하는 경우가 많다.

하여간 11월 DFD의 경험은 학교에서 일하는 것에 대한 내 생각을 바꿔놨다. 11월까지는 절대로 학교를 떠나야만 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때 문득 내가 학교에서 후배들을 위해 공헌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Dr. Wu와 Dr. Goldburg에게서 배운 방식으로 학생들을 잘 가르쳐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쨌건 국과연에서 일을 시작하기로 했고, 해보지 못한 경험, 즉 산업계나 국가 출연연구기관에서 일어나는 개발업무를 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연구를 하다보면 자신이 사용하는 장비를 직접 만드는 일이 있는데, 때로는 현상에 대해 연구를 하여 논문을 쓰는 것보다 현상을 관찰하기 위한 기술적인 일을 할 때가 재밌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연구에 1시간을 투자할 때 1시간의 결과는 보장되지 않지만, 기술적인 일은 대개 1시간의 결과가 있는 경우가 많아서 심적으로 편안한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회로를 만든다거나 프로그래밍을 한다거나 하는 것을 나 개인적으로도 잘 하는 편이고 또 즐기기 때문에 개발에도 소질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결국 2011년 6월에 국과연에 들어왔고, 나는 내가 biomimics 정도의 vortex control을 통한 maneuvering이라던가 그런 일을 할 줄 알았다. 쉽게 말해 곤충처럼 날 수 있는 무언가라던가. 하지만 예상 외로 나는 rigid한 금속으로 이루어진 엔진에서 일어나는 연소현상과 연료분사에 대한 업무를 하게 되었다. 알고보면 내가 했었던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이긴 했다. 다시 말해 나름 전공은 살리는 일이었다. 대학원 시절 UPMC(Univ. of Pitt. Medical Center)의 Cancer Institute와 함께 flow cytometry에 대한 공동연구를 한 적 있다. 이 과정에서 atomization과 vaporization, 그리고 그에 따른 visuallization은 약간의 경험이 있는 편이었고, 그러한 측면에서 국과연에서 내게 주어진 일들은 너무나 흥미로운 연구가 될 수 있는 포텐셜이 있는 문제들이었다.

하지만 가장 큰 setback은 시간이었다. 나라에서 요구하는 스펙은 높은데, 연구소에서는 그런 스펙을 거절하지는 못하고, 결국 저렴한 값에 높은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연구원들이 열심히 일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연구소라 불릴만한 일보다는 시급한 업무를 해결하는데 시간이 더 쓰이기 마련이다. 쉽게 말해 국방과학연구소의 '연구소'라는 명칭은, 예를 들어 로스알라모스 국립연구소의 '연구소'보다는 삼성전자'연구소'에 더 가까운 의미를 지니고 있다. 명확하고 시급한 미션이 있는 연구소의 연구활동은 시간적인 제약이 있기 마련이다. 예전에 Dr. Wu가 세상에 흥미로운 문제는 많지만 모든 문제가 다 가치가 있진 않다고 했었다. 하지만 흥미로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여유가 없었던 게 나에게는 힘든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요약하자면 국과연에서의 3년은 아주 도움되는 시간이었다. 내가 모르던 세상을 알았고, 특히 엔지니어링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여러가지 요소들 간의 트레이드 오프, 그리고 양산시에는 말단 단순노동자까지 고려하는 설계의 마진. 국과연, 특히 내가 속해있던 4본부 추진센터 2실은 좋은 곳이었다. 좋은 보스들을 만났고, 특히 팀 업무와는 상관없이 개인적으로 존경할 만한 분들도 있었다. 같이 일하는 coworker들도 모두 좋은 분들이었기 때문에 연구소를 떠나는 것은 큰 결정이었다. 단 하나, 내가 공학에 꿈이 있어서, 내 손으로 만든 엔진이 실제 비행기를 날게 한다거나 하는 꿈이 있다면, 이곳은 내 평생의 직장이 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좋은 사람들과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컸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공학, 특히 항공공학에 대해 큰 감흥을 가지지 못한다는 게 문제다. 내가 만든 엔진이 날아가는 장면을 생각해봤는데, 짜릴할 거 같긴 하지만 거기에 내 의미를 찾기 어려웠다. 나는 더 fundamental한 문제를 풀고 싶었다. 유체물리에서도 아직 풀리지 않은 난제가 많이 있다. 난류, 특히 선형적으로 안정된 pipe flow라던가, atomization의 문제라던가, 지금 내가 집중하고 있는 vortex dynamics라던가. 그런 문제에 더 집중하고 싶었고, 특히 학교에서 내 후배들에게 더 줄 수 있는게 있을 거 같았다. 그래서 나는 학교로 돌아가 학교에서의 커리어를 추구하기로 했다.

잘 안다. 요새 job market이 녹녹치 않다는 것 안다. 아마 한국에서 유체물리 전공으로 물리학과 교수가 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기계공학과로 간다면 내가 추구하는 기초적인 문제에 집중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내가 가려고 하는 포지션에서 몇 년을 지내다가 잘 안되서 결국 국과연이나 항우연 등에 입사하여 축하를 받는 사람들도 많이 봤다.

하지만 나는 아직은 좀 더 도전하고 싶어서, 이른바 2보 전진을 위해서, 1보 후퇴하기로 했다. 정년이 보장된 선임연구원 자리 버리고, 비정규직으로 가기로 했다. 이는 순전히 내 의지에 의한 것이며, 고등학교 1학년 때 가졌던 물리학도의 꿈이 조금 남은 것을 불살라볼 참이다. 다음주, 3월 3일부터 서울대학교 기계공학과에 연구교수로 합류하기로 했고, 최대한 좋은 논문을 많이 써서 학계에 임팩트 있는 사람이 되어보려고 한다.

IK

Sunday, April 29, 2012

4주 군사훈련

지난 3월 29일부터 4월 26일까지 29일간 전문연구요원 4주 군사훈련을 다녀왔다.
자세한 소감 등등은 됐고. 그냥 매일 매일 매 순간 기록한 메모장을 편집하여 공개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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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 (목) 비
Day 1
국가주의. 이성은 감성의 대체제. 감정을 공유할 수 없는 집단에 대한 통제 방법. 군대는 3차적 대체제인 비인격화를 통한 인격의 목적화를 통하여 그 통제 수단을 찾는 듯 하다.

3/30 (금) 비
Day 2
5시에 불침번 (1)
총기수여식. 중대장이 총이 왜 중요한지 이야기함. 중요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란다. 나는 중요한 일과 대상을 포기하고 여기에 와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I think people are good here. Group of good people not necessarily does good things. There are lots of nonsense in this show of "soldiering". The show is really, seriously gay. I just don't get why I have to do this.

3/31 (토)
Day 3
상의에 이름표 부착. 객체에 인격성을 부여하는 의미인가?
도루코 6중날 면도기를 여기서 처음 써볼 줄이야. 하지만 기대보다는 별로다.
하루가 바쁘게 지나감.

4/1 (일)
Day 4
종교행사 참석 후 청소 등을 함. 시간을 때우기 위해 일을 만드는 듯.
오후 종교행사. 사람 많은 곳은 어디나 시장바닥과 같이 씨끄럽다.

4/2 (월) 오후 비
Day 5
5시에 불침번 (2)
아침 점호시 체력훈련이 힘듬. 이대로 가면 어깨와 무릎이 아작날 거 같다. 체력훈련에 지쳤는데 군가를 또 시키다니. 전박사는 어른우대정책으로 편하다 했는데 그런거 없는 거 같다. 너네도 늙어봐라.
오전은 군사보안 교육. 직장에서 전산담당자 직책 이전을 하지 않고 온 것이 떠올랐다.

4/3 (화) 비
Day 6
아침 우천으로 체력훈련 생략. 살 거 같다.
아침식사 때 비엔나 소세지가 남았는지 많이 퍼준다. 남겼다. 식사후 처음으로 비데에서 용변을 봄. 시원하다. 비데는 세상 최고의 발명품이다.

4/4 (수) 맑음
Day 7
오늘은 아침 구보(뜀걸음)를 두배로 길게 했다.
근력운동은 요령이 생겨서 피로가 덜 하게 할 수 있으나 달리기는 그럴 수 없다.
오전에는 총기 기계훈련. 오후에는 충성교장에서 총기 예비훈련. 별로 힘들진 않았다.
식사는 지나친 고칼로리 고탄수화물 고염분인 듯. (예: 밥+잡채+식혜)
군대의 사회화, 사회의 군대화.

4/5 (목) 맑음
Day 8
4시에 불침번 (3)
아침 점호 운동이 너무 힘들다. 다리가 땡김. 걷기 힘들다.
부재자 투표소가 굉장히 멀다. 나중에 들어올 사람은 부재자 투표 신청을 하지 말 것을 권유하는 것이 좋겠음.
이곳에도 이제 개나리가 피기 시작.
사격술 예비훈련 후 체력단련. 식사 후 벽돌 나르기까지 함.
소대장 간담회에서 캔커피를 줬다. 이히히.

4/6 (금) 맑음
Day 9
영점사격. 5회째 합격함.
사격중 시계줄이 망가짐. 앞으로 불편할 듯 하다.
영점사격장은 40분정도 걸어서 옴. 합격 후에는 지루한 기다림.

4/7 (토) 맑음
Day 10
6시에 불침번 (4)
지겹다. 지루하다. 4주가 이렇게 긴 줄 여태 잘 몰랐다. 3/29에 입소할 때 올히 윤년이라 있었던 2/29에 대해 생각했다. 그날의 기억이 너무 아득해서 4주가 꽤 길겠구나 생각했었는데 역시나 길다.

4/8 (일) 맑음
Day 11
부활절 주일 아침 예배. 달걀 안줌.
오후 오침 2시-4시.
별다른 큰 일 없이 지나감.

4/9 (월)
Day 12
15 km 행군날 아침. 아직은 맑다. 아침점호 생략. 15 km 걷는 중 7 km 정도부터 발목 통증 시작됨. 끝난 후에는 허리 어깨 ㅁ릎 발목 발가락 통증. 개나리는 흐드러지고.

4/10 (화) 아침에 흐림->오후에 비
Day 13
불침번 (5)
40분간 이동하여 경계교육장 도착.
하루하루가 지날 수록 비효율적이며 무용한 이 군사훈련이 번거롭게 생각되고 지루하며 때로는 짜증이 나고 화가 난다. 우천으로인해 비행기 이코노미의 1/3정도 되는 공간에 웅크려 대기중. 허리가 끊어질 거 같다.

4/11 (수) 밤새 비오다 갬
Day 14
Now it is only a half way to the end of the show.
벚꽃이 피기 시작한다.
뭔 사진을 자꾸 찍는다고 귀찮게 한다. 사진은 뭐 이리 많이 찍는지... 사진사가 연대장 친구인가... 병사의 초상권은 어디에?

4/12 (목) 맑음
Day 15
5시에 불침번 (6)
드디어 정확히 반이 되는 날.
한시간여 걸어서 수류탄 훈령장 도착. 오전 집총제식 훈련 후 오후 수류탄. 수류탄은 기대에 비해 느껴지는 위력은 보잘 것 없었다. 수류탄 연습던지기에서 적 표식에 맞추면 상점을 준다고 했지만 하나도 못맞춤.
물집 생김. 허리에 무리가 지속적으로 가해지는 것 같고 발목과 발가락(우1)의 통증이 계속된다. 저녁엔 쓰잘데기 없는 "자살사고 예방교육".

4/13 (금) 아침에 잠시 흐리다 갬. 오후 맑음.
Day 16, D-13
주간 지형지물, 장애물 돌파요령 교육. aka 각개1 or 기초각개. 포복 등 동작이 어렵고 부상 위험이 큰 동작들.

4/14 (토) 아침에 안개 후 갬.
Day 17, D-12
토요일이라 쉼.

4/15 (일) 맑음
Day 18, D-11
2시에 불침번 (7)
일요일, 쉼. 시간 참 안간다.

4/16 (월) 맑음
Day 19, D-10
화생방 훈련: 다 잘 했는데 마지막 나오면서 크게 한번 흡입. 눈도 크게 뜸. -> 낭패.

4/17 (화) 아침에 안개
Day 20, D-9
기록사격 하는 날. 이제 슬슬 하루하루 메모 남기는 것도 귀찮아지고 있다. 다른 생각도 잘 안나고. 그저 시간이 언제 다 가나 하는 생각 뿐...
기록사격은 215명을 10개 사로에 배치해서 22개조로 나눔. 나는 16조에 배정됨. 20발중 10발 맞춰 합격. 100m 표적 맞추기 은근히 힘들다. 17발 째 10발 성공. 이후 3발은 급격히 집중력이 저하되어 아무데나 쏘게 된 듯. 어쩄건 합격. 야간 사격은 그냥 막 쏘면 됨. 하나도 안보임. 담당 분대장이 재밌지 않냐고 했는데 사실 재미는 없었음.
21시 30분에 불침번 (8)

4/18 (수) 맑음
Day 21, D-8
오전 정신교육. 지겹다.
오후에는 감찰설문. 저녁에 예정된 체력 검정은 의경들만 하고 우리는 안함. 아싸.

4/19 (목) 맑음 후 오후 비
Day 22, D-7
각개전투. 오전에는 수류탄 투척 연습. 시가전 모의 연습, 화생방 치료법 강의
오후에는 종합각개전투.

4/20 (금) 구름 많음
Day 23, D-6
3시에 불침번 (9)
유격. 유격체조는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평소 안쓰는 근육을 자극하는 듯. 설설 대충 해도 뭐라 안함. (전문연이라 그런 듯) 이로써 모든 훈련 종료 (except 행군)

4/21 (토) 비
Day 24, D-5
오전에 장구요대, 탄알집 주머니, 수통피 등 세척. 드디어 각종 옷의 교번주기표와 이름표를 필요한 최소갯수를 제외하고 모두 제거함. 저녁식사부터 우리 소대가 배식을 담당한다. 선배식은 쉬움. 후배식이 일이 많은 듯. 비가 와서 온갖 봄 꽃이 다 떨어진다. 목요일 퇴소라 조금 기대했는데 거센 빗살에 모두 떨어져 아쉽다.

4/22 (일) 비 후 갬
Day 25, D-4
별 일 없이 지나감.
배식일이 생각보다 많으며 덕분에 시간이 조금 더 빨리 가는 느낌. 밤에 라면 취식이 있었으나 먹지 않음.
22시에 불침번 (10). 드디어 초번초를 해봄.

4/23 (월) 구름
Day 26, D-3
한가한 아침. 배식소대도 뜀걸음을 함. 10시반 '초빙교육'이 있어서 28연대 강의장으로 감. 탈북자 가수 '김미영'과 가수 '김나희'가 뭔가를 함 (강연이라기엔 좀... 그렇다고 콘서트라고 하긴 좀...) 재미도 없고...
처음 들어왔을 때 폈었던 백목련이 모두 졌다. 봄은 금방 지나가네.

4/24 (화) 맑음. 쩅쨍
Day 27, D-2
마지막 20 km 행군. 오전 8시에 시작하여 12시 40분에 끝. 마지막 10분을 남기고 잠시 우측 무릎통증. 아침 후배식으로 조금 힘들었으나 어쨌건 끝. 복귀시 군악대가 마중나와서 연주함.
결막염으로 훈련병 2명이 격리됨.
23시에 불침번 (11, 마지막)

4/25 (수) 비
Day 28, D-1
끝까지 부려먹음-_-; 총검술 시간에 청소함. 지겹게 부려먹는다. 청소한거 또 하고... 한거 또 하고... stupid..
점심식사 후 연대장 정신교육 -> 28연대 강당
이쯤되니 매사 짜증만 나고 귀찮기만 한 나 자신을 발견. 내일이 되면 안그러겠지.
저녁을 먹은 후 마음이 다시 너그러워짐.

4/26 (목) 맑음
Day 29, D-Day
전날 모든 개인 용품 정리하고 오늘은 새벽 5시에 일어나 세면을 함.
이제 5시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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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소 5시간 전을 마지막으로 내 메모는 끝났지만 마지막 소회로는 나이 갓 50이 안된 연대장 들어온다고 '모든 방문객 여러분'들한테 '허리를 펴고 있으라'라고 한 멘트는 좀 많이 무례했던 거 같다. 군대가 좀 겸손해져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스팅 끝.

IK

Monday, January 16, 2012

Pittsburgh - 차 밀릴 때 공항 가는 방법

2010년 4월 30일에 작성하다 만 포스팅 마저 작성하여 올린다.

피츠버그도 rush hours에는 차가 많이 막힌다. 유학생으로서는 도시 밖으로 나갈 일이 사실 공항 가는 거 말고는 별로 없는데 평상시를 생각하고 rush hours에 공항을 향했다가 길이 막히면 난감하기 짝이 없다. 공항 가는 길이 막히는 것은 주로 인근 Carnegie, PA나 Crafton, PA 등지에서 출퇴근 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퇴근하기 때문이고, 또 주요 도로가 Fort Pitt Bridge 하나밖에 없어서 그런데, 그럴때 다음의 길을 이용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공항가는 길이 예기치 않게 밀리는 일은 정말 예기치 않게 발생하기 때문에 이 팁을 미리 알고 있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가장 차가 막힐 때인 금요일 오후에 교통 상황이다.
보라색으로 공항까지의 보통의 경로가 있는데 학교에서 다운타운까지, 그리고 다리를 지나서 조금 더 아주 많이 막히는 것이 보인다. 다른 곳에도 좀 빨간 곳이 있지만 실제로 크게 막히는 곳은 Port Pitt Bridge 근처이다.

여기서 살짝 경로를 바꾸면 시간이 좀 절약되는데,


지도보기

여기서 보면 경로가 거의 바뀌지 않은 거 같지만 다운타운에서 579타는 곳은 exit only로 같은 376 위라도 막히지가 않는 차선이기 때문에 이 경로를 따르면 크게 막히지 않고 다운타운까지 근접할 수 있다. 그리고 Ohio River Blvd를 통해 west end bridge를 통하고 PA-19/51을 통함으로서 막히는 Fort Pitt Bridge를 우회하여 다시 376에 진입할 수 있다.

주의할 점은 정말 막히는 날에는 이쪽도 막힌다는 것.
그럴때는 Ohio River Blvd를 따라 쭉 올라가는 방법이 있다. 통행량이 많은 길은 아니지만 신호가 많아서 은근히 시간이 더 걸린다. 40분 정도.

IK

Monday, November 01, 2010

오랜만에 포스팅

내가 성격이 안좋아서 간단한 글을 잘 못남기는 면이 있다.
하여간 그동안 쓰다가 draft상태로 방치된 글 모음집

모든 글은 드래프트 상태기 때문에 완전하지 않고 좀 이상하다. 그냥 지우기 아깝고 그렇다고 완성하기엔 좀 귀찮고 하고싶던 말도 까먹고 해서 그냥 올리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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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9/2/2008
제목: Ames, IA

내용:
이전 글에서 '개인적인 일'로 인해 블로그가 거의 정체상태였다고 했었는데 이제 대충 그 일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도 될 거 같다.

어제 월요일은 미국에서는 휴일이었다. 세계 국가들이 주로 5월에 배치하여 하루 쉬는 May Day, 이른바 '노동절'이라 불리는 Labor Day였고, 그래서 토-일-월 3일의 휴가가 오랜만에 주어졌다. 나는 그 틈을 타서 미국 다른 곳을 다녀왔다.

Ames, IA

미국의 거의 정 중앙에 Iowa라는 주가 있다. 동쪽으로는 Chicago가 속해있는 Illinois주와 접해있고, 북으로는 Minneapolis가 있는 Minnesota, 서쪽으로는 워린 버핏으로 유명한 Omaha가 있는 Nebraska가 있다. Iowa주의 중심에는 주의 수도 Des Moines가 있으며 그 북쪽으로 40마일 거리에 Ames라는 작은 city(라 주장하는 곳)가 있다. 내가 지난 주말에 다녀온 도시도 이곳이다.

이곳에는 Iowa주의 주립 대학인 Iowa State University가 있다. 내가 이곳에 다녀온 이유는

한줄 요약: 나 여자친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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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9/4/2008
제목: 문과와 이과에 대한 소고

내용:
음 별다른 계기는 없고, 웹서핑 하다가 이공계 기피 현상 어쩌고 하는 글들이 좀 보이길래 내 맘대로 쓰련다. 딱히 목표한 주제가 없으니 어떤 결론에 당도할 지는 이 시점에서 나도 모르겠다.

1. 이과와 문과의 분류에 대해서
나는 항상 나는 '이공계'라고 분류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나는 Science와 Engineering을 무심결에 합쳐놓는 것은 좀 무분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거에 대해서는 이전에도 쓴 적이 있는데, 최근에 서울과학고 출신이라고 알려진 최가야씨가 그린 '공길동전'이란 만화에서도 '세상의 직업의 분류'에 대해 나온다. (참고)

한줄요약: 물리는 공대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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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11/18/2008
제목: Stereotype

내용:
근대 정치적 진보주의 중에 가장 큰 성과가 있다면, 집단주의 혹은 전체주의에 대한 강한 거부일 것이다. 물론 아직 이것들이 국가주의나 권위주의에 대한 완전한 타파가 되지 못하긴 했지만 여성차별이나 인종차별 등에 대해서는 굉장한 성과가 있었다.(물론 아직 갈 길이 멀다.)

이런 것들이 어떻게 연결되느냐.. 나는 그것들이 연결되는 그 가운데에 'stereotype(ing)'이라는 단어가 들어간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만나는 사람들을 판단한다. 만약에 사람들을 분류하고 그들이 가진 공통적 표제들을 정리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stereotyping'이 되는 것이다. 한국 말로는 뭐가 적당할까?

사실 사람들은 그들이 속한 표제 안에서 어느정도 공통점을 가질 수 있으며, 혹은 공통점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집단이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어떤 개인과 그가 속한 단체 사이에 어떤 연관성(correlation)은 있을 수 있지만, 그 인과관계는 명확치 않다. 즉 그가 '그런 사람'이기에 '그런 단체'에 들어왔는지, '그런 단체'안에 있는 '그런 사람'의 영향을 받아 '그런 사람'이 된 것인지 인과관계를 명확히 할 수 없다. 그리고 단체가 커질 수록, 그러한 연관관계 또한 없어지는 경향이 강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진보적인 사람이라면 자신이 어떤 stereotype을 만들었을 때 그것을 새로 만난 사람에게 적용하는 데 있어서 매우 저어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내가 가지고 있는 진보에 대한 stereotype이 아니라, 진보가 가져야할 윤리라고 생각한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역사적으로 1900년대 이후에 '진보'라는 것은 대개 반권위주의적, 반전체주의적인 방향이었고, 개인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그 역사가 진행되어 왔다. 하늘이 주신 인권이라는 것이라는 개념 자체가, 타인의 간섭 없이도 가질 수 있는 인간의 권리,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이 사회적으로 적응을 못해도 가질 수 있는 권리라는 것이 이른바 1900년대 이후의 진보세력들이 중요시하는 것이고, 그러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중에 하나는 다소 종교적일 수 있지만 'God created all men (and women) equal'라는 거다. 현재는 자유니 분배니 평등이니 하는 세부적인 이데올로기로 많은 나라에서 정치싸움이 있긴 하지만 보편인권을 거부한 정치세력은 20세기 들어 (거의) 모두 몰락했다.

한줄요약: 개인편차가 그룹간 편차보다 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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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1/29/09
제목: 50보는 100보와 같은가?
내용: 안같음 ㄱ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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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10/1/2009
제목: 성폭력에 대하여

내용:
최근에 성폭력이 이슈이다.
한국에 성폭력이 너무 만연하고 여성들의 자유의지를 억압하는 일이 만연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어찌 보면 나도 그런 남성주의적인 구조를 반하는데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혹은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나의 잘못으로 인해, 혹은 어렸을 때 나의 잘못된 행위로 인해서 다른 여성 친구들에게 줬을 지도 모른 잘못에 의해서 나도 가해자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러한 자기반성은 나중에 좀 더 시간을 들여서 하고, 지금은 난 왜 '성폭력'이 왜 그리 나쁜 것인지, 아니 그보다는 왜 그리 피해자들에게 트라우마를 주는지 하는 궁금증이 든다.

일단 폭력은 일반적으로 물리력을 포함하여 완력적인 힘 혹은 그런 힘을 행사하는 행위이고, 성폭력은 그러한 폭력이 '성'의 문제와 관련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약간 미국적인 기준을 들이다대면, 물리력/완력이 중요한 것 보다도 가해자가 우위에 있는 점(물리력 행사 능력 뿐 아니라, 사회적 지위도 포함)을 이용해서 강제로 윤간을 하려 하거나 성적으로 불쾌감을 주는 행위를 했을 경우 sexual harassment라고 한다. 물론 sexual harassment는 sexual violence보다는 훨씬 mild한 어감이지만. 하여간 중요한 것은 (물리적 혹은 비물리적 힘)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의 자유의지에 반하여 그 사람으로부터 성적인 즐거움을 취하려 했을 때 그것이 성폭력이라고 하면 맞을 듯 싶다.

다시 말해 여기서 빠질 수 없는 개념이 '힘'이라는 개념이다. 만약에 5살짜리 남자어린이가 예컨대 25살 여성과 성관계를 맺었을 경우, 그리고 25살 여성이 그걸 원하지 않았더라 하더라도, 그것이 남자 어린이가 여성을 상대로 행사한 '성폭력'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한 면에서 성폭력은 폭력의 범주에 포함되고, 폭력이 수반되지 않는 성폭력이 있기 어렵다는 데에 다른 사람도 동의하는 지 먼저 궁금하다.

그러면 폭력과 성폭력이 있을 때 그 죄질이 다르다면 아마 '성'이라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무언가 특수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라는 것에 내 인식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가 두번째 내 궁금증이다.

조금 더 명백히 하기 위해서 폭력을 먼저 생각해보자면, 우리가 자라면서 학교에서는 수많은 폭력이 있다. 학생이 학생을 상대로 서로 싸우는 것이 저학년의 패턴이라면 고학년이 되면서 학교에서는 '주로 폭력을 행사하는 자'와 '주로 맞는 자'가 존재한다. 그 뿐 아니라 교사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도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 학교를 다닌 대부분의 사람은 그러한 폭력에서 가해자이거나 피해자였던 경험이 대개 있을 것이다.

물론 학교폭력은 안된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8살때 학교에서 당한 폭력으로 20년동안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거다. (물론 있다.)

한줄요약: 성폭력이 특별한 것은 성이 특별하기 때문인데, 잠재된 죄의식이 트라우마를 트리거하는거 아닐까? 나도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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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3/15/2010
제목: 분노가 지배하는 사회

내용:
한국에서 요새 또 성폭행 후 살인 사건으로 시끄럽고, 이전 비슷한 사건들을 언급하면서 인터넷에는 과격한 말들이 오가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런 것이 인터넷의 젊은 학생들만의 여론이 아니라 국민 전체의 여론으로 보이는 것이 헌법재판소에서는 사형 합헌 판결이 났고, 그리고 여론조사에서도 사형제도 찬성이 90%가 넘고 현재 사형수들을 집행해야 한다는 의견이 80%가 넘는다는 기사가 떠다닌다. 한국에서 그 10%가 안된다는 사형 폐지론자로서 나는 한국 민중을 지배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분노'라는 것에 아주 마음이 아프다.

사람의 생명은 사람의 기술로 창조하기 어렵고 (다른 생명도 마찬가지지만) 더구나 사람은 (관념론적인 관점에서) 스스로 그 안에 세계를 구축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천부인권이라는 게 존재하는 것이다. 아 물론, 우리가 '인'이기 때문에 '인권'만을 주장하는 것이긴 하지만 우리가 추구해야할 방향이 포괄적으로 인권이 존중되는 사회다. 역사적인 서술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각자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서 국가와 사회를 형성한다. 관점에 따라 생각하는 것이 다를 수 있는데, 나는 분명히 '개인이 있고 이후에 사회를 구성했다'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사회를 떠난 인간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개개인의 인권을 지키는 것이 사회를 이루는 가장 지상 과제가 될 것이고, 내 생각에 공공의 안전보장이 개인의 인권보다 우선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사회를 이루고 살아간다는 것은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이 특정한 절차에 의하여 (정치 시스템) 타협을 하고, 그 룰에 동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가장 큰 문제에 도달하는데, 민주주의라는 절차는 그 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결국에 동의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이루는 사회에, 그에 속할지 속하지 않을지 하는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는다는데 기인한다. 대한민국, 혹은 다른 어떤 국가체제의 공권력이 그 영토 내에 존재하는 한,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그 룰은 사실 자신이 동의하지 않아도 따라야 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사회는 그 룰을 따르지 않기로 한 사람을 (사회의 안전을 위하여) 격리하고 싶어하는데 그 수단이 '구속'이 되고, 극단적인 형태로 '종신형'이 있을 수 있다.

격리의 가장 영원한 형태는 '종신형' 혹은 '무기징역'일 수 있는데, 그보다 한단계 더 나아가 '사형'이라는 제도를 생각하는 것은 나에게는 '분노'의 감정을 더한 것 이상으로는 잘 생각이 되지 않는다. 또한 파렴치한 범죄자는 고통스럽게 죽여야 한다거나, 그 자들을 자신의 세금으로 먹여살리기 싫다는 리플에서 보여지는 가장 큰 감정 역시 '분노'이다. 어떠한 잘못된 행위를 보았을 때 분노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인지상정이나, 그 분노의 감정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은 또한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이라 생각한다.

유토피아적인 이야기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선과 악이 뒤섞여있는 경우를 많이 본다. 최근에 내가 가슴아프게 알게 된 이야기는 2002년 스위스 상공에서 DHL의 수송기와 러시아의 한 민항기가 공중충돌한 사건이다. 수십명의 인명이 희생된 것의 원인은 관제사의 실수였는데, 관제사는 당시 레이더와 전화선이 수리중인 와중에 여러대를 혼자 관제하고 있었다. 결국 그가 그 중 한 대의 비행기에 잘못된 명령을 내려 충돌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2년 후 그는 유족 중 한명에 의해 살해된다.

한줄 요약: 나 사형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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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8/4/2010
제목: 본격 애플 까는 글

내용:
제목은 저렇게 썼지만 그보다 이건 내가 왜 애플을 싫어하는 이유에 대해서, 그리고 왜 그 회사의 미래를 밝게 보지 않느냐에 대한 글이다.

지난 안테나게이트에서 잡스는 '우리는 소프트웨어 회사다'라고 얘기를 했는데, 이것은 잘못된 말이다. 분명히 말하자면 애플은 하드웨어 회사다. 애플의 제품을 써보면 분명 '소프트웨어는 괜찮은데 하드웨어는 별로다'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어떤 회사가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를 잘한다고 소프트웨어 회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애플은 하드웨어 회사인데,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를 잘 한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경우는 키보드와 마우스의 품질 면에서는 정말 훌륭한데 그렇다고 키보드와 마우스를 파는 회사는 아닌 것과 같다.

애플이 왜 하드웨어 회사냐, 소프트웨어를 팔지 않기 때문이다. 애플의 소프트웨어 팀은 애플의 하드웨어 팀에게만 소프트웨어를 판다. 예를 들어 애플의 OS를 보면, 애플은 OSX를 다른 하드웨어 회사에 팔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애플의 소프트웨어는 기본적으로 애플의 하드웨어를 위해 존재한다.

마이크로소프트와 IBM이 컴퓨터 산업계에 크게 공헌한 바는, 그들이 '범용' 컴퓨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IBM이 IBM PC의 표준을 제시하고 (표준만 제시하고), 마이크로소프트가 많은 하드웨어를 지원하는 소프트웨어를 만들면서 비로서 경쟁이 시작됐다. 물론 마이크로소프트가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반경쟁 행위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하드웨어 분야에서 경쟁을 촉진시킨 것은 큰 업적이다. 경쟁이 시작됨으로서 드디어 부품의 가격이 낮아지고 전자장치의 가격이 크게 낮아지게 되었다. 물론 트레이드오프가 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모든 하드웨어를 지원한다는 것을 표방하고 제품을 만들기 때문에 독특한 방식으로 만든 제품의 경우 문제가 있었다. 모든 업체들이 같은 가정 하에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인 일이다.

하지만 가격의 하락은 정보가 힘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시대에서 정보의 보급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애플은 경쟁에 동참하지 않음으로서 자신들의 높은 가격을 유지하고 있는데, 정보의 보급, 가난한 자의 정보 그런 화두에 관심이 없는 기업이 아니라면 시장의 미아너리티로서 쓸 수 있는 전략에 불과하다.

사실 많은 애플의 '장점'은 이 회사가 시장의 마이너리티이기 떄문에 가능한 것이 많다. 예를 들어 보안의 경우는 애플의 OSX는 알려진 보안 헛점을 몇년이 지나도 잘 고치지 않기로 유명한데, 그러고도 MS보다 보안에 강하다던지 그런 헛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유는 OSX가 시장지배자가 아니라서 해커들이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디자인의 경우에도 많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가끔 보이면 쿨하다던지 예쁘다던지 그런 소리를 듣는 거다. 아이폰을 보면 이제 아이폰보고 누구도 쿨하다거나 예쁘다거나 그러진 않는다. 오히려 너무 흔해빠져서 지겹다는 얘기도 들리지 않는가.

다시 애플은 하드웨어 회사라는 얘기로 돌아가서,

한줄요약: 나 애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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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이정도
IK

Saturday, October 30, 2010

the unspeakable

Morewood Ave.를 지나 Carnegie Mellon University로 들어간다.
Doherty Hall에 들어가서 지하로 내려간 다음 Wean Hall로 간다.
그리고 6층에 CMU 물리학과를 거쳐 Scaife Hall쪽으로, Schenley Park방향으로 나왔다.

내가 University of Pittsburgh를 다녔지만 바로 옆 학교인 CMU는 익숙하다. 수업을 두개나 들었고, 두 학교의 물리학과가 콜로퀴움을 같이 하는 관계로 숱하게 왕복했다. 하지만 새삼 그동안 그 광경들이 그다지 변하지 않은 것을 느낀다.

한국에 비해 미국의 도시는 덜 변한다. 심지어 6년 전에 아는 분들과 사진을 찍었던 공원의 벤치조차도 그대로 있다. 그곳에 잠시 앉아서 쉬었다. 경치가 많이 변하면 사람이 변해도 그것이 덜 눈에 띄일 텐데, 경치가 변하지 않으니 내가 변하고 너가 변하고 그들이 변한게 너무나 눈에 띈다. 그냥 그렇게 몇분 앉아있었다.

문득 일어나 카네기 공립 도서관을 향한다. 다리를 건넌다. 정돈되지 않은 다리 밑 모습이 어색하지 않다. 도서관 앞은 예전엔 거대한 주차장이었는데 이제 공원이 되었다. 이거 하나는 좀 바뀐거 같다. 학교가 가까웠지만 가기 싫었다. 그냥 그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지난 6년간 만났던 사람들, 특히 오랜 친구들이 생각난다. 나는 지난 6년간 뭘 했나. 과연 내가 방금 제출하고 온 논문은 6년의 세월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 이걸로 디펜스를 하면 박사는 받을 수 있는 건가? 박사 받으면 뭐하지?

나는 혼란한데 이놈의 피츠버그는 너무 혼란하지 않아서 혼란스럽다.

10/30/10. 논문을 외부커미티인 CMU의 Garoff교수한테 전달하고 나서.

Wednesday, July 07, 2010

Symphony of science

최근 지인의 추천(?)으로 알게 된 것인데 들으면 들을 수록 중독되는 느낌이라 여기에도 소개해본다.

Carl Sagan - 'A Glorious Dawn' ft Stephen Hawking (Symphony of Science)


Symphony of Science - 'We Are All Connected' (ft. Sagan, Feynman, deGrasse Tyson & Bill Nye)


프로젝트 "Symphony of Science"

Tuesday, July 06, 2010

김여사 단상

한국에서 인천대교에서 버스가 뻘로 추락하는 사고가 났는데 그 원인이 길가에 고장나서 세워둔 40대? 혹은 50대 여성운전자 김모씨의 마티즈라고 하여 또 무슨 김여사 논쟁이 있는 거 같은데... 나도 사건의 전말은 잘 모르고 사건에 대해서는 수많은 레퍼런스가 있으니 알아서 찾아보시고...

하여간 이런 얘기 나오면 항상 있는 얘기가 '여성이 남성보다 공간지각력이 떨어져서 운전을 못하는 건 사실인거 같다'라는 건데. 과연 그럴까.

뭐 나도 저 얘기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동의를 안하지는 않긴 하지만서도. 실제로 운전 현장에서 위험항 상황에는 언제나(!) 여성 운전자가 involve되는 것을 경험한 개인적 편견일 수도 있겠다만. 이건 정말 미스테리인데, 난 미국 살면서 한번도 여자가 운전을 못한다거나 그런 얘기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게다가 미국에서도 한국 여성은 운전을 못하는데 미국 여성이 운전을 못한다거나 미국 친구가 자기 와이프/여자친구 운전 못한다거나 뭐 그런 얘기는 더더더더더더욱이나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나의 경험들을 종합하여 내가 내린 결론은 '한국 여자는 (대체적으로) 운전을 못한다'인데, 정말 웃기지 않나; 자동차는 비행기가 아니다. 내가 비행기 맨날 타고 다니지만 비행기 조종은 못한다. 반면 차는 세상 누구나 다 운전하는 거다. 근데 왜 한국 여자만 운전면허가 장롱이고 왜 같은 나라 남자에 비해 statistically significant한 만큼 더 교육을 받아야 하나. 다른 외국에 있는 친구들 생각해보자. 진짜 그렇게 significant하게 남녀의 운전 스킬이 차이난다는 나라 있나? 심지어 세상에서 운전 가장 어렵다는 뉴욕에서도 못들어본 말이다. 서울이 아무리 막히고 운전이 거세도 뉴욕보다는 낫거덩.

다 교육의 문제다. 언론이고 학교고 과학자고 부모고 어렸을 때부터 '여자가 무슨 자전거니', '원래 여자는 공간지각력이 떨어져', '여자는 원래 수학도 못해', '운전은 남자가 하는거야', '무슨 남자가 운전도 못하니' 뭐 그런 소리들을 해대니 여자들이 운전을 못하는거다. 운전 별거 없다. 그냥 앞 보고 잘 달리고 틈틈히 주변 보면 된다. 운전하는데 무슨 공간지각력이 필요하나. 그냥 걸어가는 거랑 똑같은데 속도만 조금 빠를 뿐. 근데 모든게 다 그에 맞춰서 scale이 되어있기 때문에 어려울 수가 없다. 세상 10억 20억 인구가 하는건데 이렇게 못하겠다는 사람을 abundant하게 볼 만한 것이 아니다.

한국 여자들 운전 못하는 거 맞는거 같긴 한데, 이거 다 기분탓이다. 그냥 자신감 가지고 잘 몰면 다 잘 몬다. 스스로 운전 어렵다고 생각하는 여자들, 당신들 잘 하고 있다.

IK

Monday, March 01, 2010

My footage, July 2004 - September 2009

2004년


친구들과 마지막 여행을 뒤로 하고 (7월 17일)


피츠버그에 입성 (8월 19일)


그날 저녁;;;


유명한 Zurek의 콜로퀴움을 들으며 유학온 보람을 느꼈으나 (10월 12일)


인생이 힘들어서 놀러간 곳이 Cleveland, OH (11월 22일, thanksgiving break)


결국 한국으로... 12월 29일에 여자들에게 둘러쌓여...

해가 지나 2005년


사라장이 피츠버그에... 2월 12일


3월 8일, spring break를 맞아 san francisco, 이곳은 버클리.


4월 10일. 피츠버그 생활 친구 창수와 봄맞이 마실


한국 가려다가 기체결함으로 시카고에서 1박... 5월 2일.


어쨌건 한국 도착. 오랜만에 동아리공연도 보고, 오랜만에 99 동기들이랑... 5월 11일.


피츠버그로 돌아와보니 커플이 되어있는 유학동기 둘;;; 6월 9일


쉰리팍에서 여유로운 어느 오후. 7월 4일. shhong 찍음.


타석에 있는 상대편 투수. 7월 23일.


타석에 있는 상대편 투수. 8월 3일.


10월 23일 저녁 먹으면서. 피츠버그에 새로운 친구 등장.


thanksgiving때 놀러간 곳.


12월 25일. 난생 처음 가본 뉴욕.

그렇게 한 해가 또 가고
2006년


불장난. 1월 14일, 라쿤 크릭.


누군가(들)의 생일(들)이라 모인 사람들. 1월 14일.


피츠버그 스틸러스 수퍼볼 40 우승. 2월 5일.


2월 11일 부시네 집. 물리과 형님들과 함께.


3월 11일, spring break에 south bend state park, wv


6월 4일. 이런 저런 일 힘든 일이 겹쳐 한국 가기로 함. 공항가는 버스 기다리는 중.


8월 12일. 매 여름마다 돌아오는 피츠버그 아트 페스티발.


천문대에서 폼도(만) 잡아보고, 9월 29일.


순전히 기차를 타보고 싶어 떠난 무박 2일 시카고 여행, 11월 23일.


12월 30일.

2007년.


2월 15일. 무의미한 자이언트 이글 샷.


화공과의 상은누나와 아마존에서 티셔츠 공동구매;;; 3월 10일.


3월 12일. 학회가는 비행기 안에서 게임 대박.


그리고 나서 첫 학회 발표. 학회장 앞에서 이상훈 박사(당시는 학생)와 함께. 3월 13일.


가끔 내 책상을 침탈하던 아랫층 살던 어린이. 3월 16일이면 학회에서 돌아온 당일일텐데 ㅎㄷㄷㄷ


KAO in Chicago, 4월 21일.


Louisville, KY, 6월 12일.


West Lafayette, IN, 8월 4일.


9월 26일. University of Pittsburgh Symphony Orchestra, John Cage 'Twenty-three'연주중


유학생활이 가장 힘들 던 때 Ithaca, NY 다녀오다가 휴게소에서. 10월 7일. :)


영국에서 날아온 황씨와 함께 간 뉴욕의 코메디클럼. 11월 22일.


2010년 3월 기준 가장 최근에 간 한국. 오버부킹된 비행기표 때문에 얻은 밀 보셔와 컴펜세이션과 비즈니스석.

2008년


오랜만의 초등학교 동창회;;, 1월 6일.


집 뒷 나무에 앉은 까마귀떼. 1월 15일. 다시 피츠버그.


New Orleans, LA. 3월 12일. 매년 이맘때 열리는 APS. 학회 스케쥴 이후에 재즈바.


CMU에 인터뷰하러 온 주은이 본다고 다들 모은 주변 동네 사람들 때문에 KAO in Pittsburgh가 됨. 4월 10일.


Penx of Pixburgh. 5월 24일 완형+로미누나와 함께 Pittsburgh Zoo


각자 따로 무심결에 내려놓은 가방 두개. 10월 6일.


흠. 11월 9일, Ames, IA


11월 29일. 단일 여행으로서는 제일 장거리 운전. 800마일 찍는 순간.


친구 잘 사귀어서 구경하게 된 JPL. 12월 25일에 결혼한 여성 친구네 집 놀러가서 남편한테 투어 받은 날.

2009년.


내 생일에 희생된 바닷가재 한마리.


피츠버그 스틸러스 수퍼볼 43 우승, 2월 1일.


APS in Pittsburgh, 3월 17일. Church Brew Works에서 카이스트 참가자들과.


3월 20일, Igdesman and Joo, Erie, PA


6월 7일 North park에서. 두 78년생분들이 젓는 배 위에서 호젓하게...


8월 16일. 두번째로 놀러간 WV의 캐빈. Lake Tygart.


9월 24일. G20로 인해 막아놓은 피츠버그 다운타운. 나는 운전기사라서 들어갔음.

이후는 사진이 없거나 정리가 안된 관계로 생략...

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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