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성격이 안좋아서 간단한 글을 잘 못남기는 면이 있다.
하여간 그동안 쓰다가 draft상태로 방치된 글 모음집
모든 글은 드래프트 상태기 때문에 완전하지 않고 좀 이상하다. 그냥 지우기 아깝고 그렇다고 완성하기엔 좀 귀찮고 하고싶던 말도 까먹고 해서 그냥 올리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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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9/2/2008
제목: Ames, IA
내용:
이전 글에서 '개인적인 일'로 인해 블로그가 거의 정체상태였다고 했었는데 이제 대충 그 일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도 될 거 같다.
어제 월요일은 미국에서는 휴일이었다. 세계 국가들이 주로 5월에 배치하여 하루 쉬는 May Day, 이른바 '노동절'이라 불리는 Labor Day였고, 그래서 토-일-월 3일의 휴가가 오랜만에 주어졌다. 나는 그 틈을 타서 미국 다른 곳을 다녀왔다.
Ames, IA
미국의 거의 정 중앙에 Iowa라는 주가 있다. 동쪽으로는 Chicago가 속해있는 Illinois주와 접해있고, 북으로는 Minneapolis가 있는 Minnesota, 서쪽으로는 워린 버핏으로 유명한 Omaha가 있는 Nebraska가 있다. Iowa주의 중심에는 주의 수도 Des Moines가 있으며 그 북쪽으로 40마일 거리에 Ames라는 작은 city(라 주장하는 곳)가 있다. 내가 지난 주말에 다녀온 도시도 이곳이다.
이곳에는 Iowa주의 주립 대학인 Iowa State University가 있다. 내가 이곳에 다녀온 이유는
한줄 요약: 나 여자친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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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9/4/2008
제목: 문과와 이과에 대한 소고
내용:
음 별다른 계기는 없고, 웹서핑 하다가 이공계 기피 현상 어쩌고 하는 글들이 좀 보이길래 내 맘대로 쓰련다. 딱히 목표한 주제가 없으니 어떤 결론에 당도할 지는 이 시점에서 나도 모르겠다.
1. 이과와 문과의 분류에 대해서
나는 항상 나는 '이공계'라고 분류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나는 Science와 Engineering을 무심결에 합쳐놓는 것은 좀 무분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거에 대해서는 이전에도 쓴 적이 있는데, 최근에 서울과학고 출신이라고 알려진 최가야씨가 그린 '공길동전'이란 만화에서도 '세상의 직업의 분류'에 대해 나온다. (참고)
한줄요약: 물리는 공대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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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11/18/2008
제목: Stereotype
내용:
근대 정치적 진보주의 중에 가장 큰 성과가 있다면, 집단주의 혹은 전체주의에 대한 강한 거부일 것이다. 물론 아직 이것들이 국가주의나 권위주의에 대한 완전한 타파가 되지 못하긴 했지만 여성차별이나 인종차별 등에 대해서는 굉장한 성과가 있었다.(물론 아직 갈 길이 멀다.)
이런 것들이 어떻게 연결되느냐.. 나는 그것들이 연결되는 그 가운데에 'stereotype(ing)'이라는 단어가 들어간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만나는 사람들을 판단한다. 만약에 사람들을 분류하고 그들이 가진 공통적 표제들을 정리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stereotyping'이 되는 것이다. 한국 말로는 뭐가 적당할까?
사실 사람들은 그들이 속한 표제 안에서 어느정도 공통점을 가질 수 있으며, 혹은 공통점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집단이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어떤 개인과 그가 속한 단체 사이에 어떤 연관성(correlation)은 있을 수 있지만, 그 인과관계는 명확치 않다. 즉 그가 '그런 사람'이기에 '그런 단체'에 들어왔는지, '그런 단체'안에 있는 '그런 사람'의 영향을 받아 '그런 사람'이 된 것인지 인과관계를 명확히 할 수 없다. 그리고 단체가 커질 수록, 그러한 연관관계 또한 없어지는 경향이 강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진보적인 사람이라면 자신이 어떤 stereotype을 만들었을 때 그것을 새로 만난 사람에게 적용하는 데 있어서 매우 저어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내가 가지고 있는 진보에 대한 stereotype이 아니라, 진보가 가져야할 윤리라고 생각한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역사적으로 1900년대 이후에 '진보'라는 것은 대개 반권위주의적, 반전체주의적인 방향이었고, 개인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그 역사가 진행되어 왔다. 하늘이 주신 인권이라는 것이라는 개념 자체가, 타인의 간섭 없이도 가질 수 있는 인간의 권리,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이 사회적으로 적응을 못해도 가질 수 있는 권리라는 것이 이른바 1900년대 이후의 진보세력들이 중요시하는 것이고, 그러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중에 하나는 다소 종교적일 수 있지만 'God created all men (and women) equal'라는 거다. 현재는 자유니 분배니 평등이니 하는 세부적인 이데올로기로 많은 나라에서 정치싸움이 있긴 하지만 보편인권을 거부한 정치세력은 20세기 들어 (거의) 모두 몰락했다.
한줄요약: 개인편차가 그룹간 편차보다 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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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1/29/09
제목: 50보는 100보와 같은가?
내용: 안같음 ㄱ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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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10/1/2009
제목: 성폭력에 대하여
내용:
최근에 성폭력이 이슈이다.
한국에 성폭력이 너무 만연하고 여성들의 자유의지를 억압하는 일이 만연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어찌 보면 나도 그런 남성주의적인 구조를 반하는데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혹은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나의 잘못으로 인해, 혹은 어렸을 때 나의 잘못된 행위로 인해서 다른 여성 친구들에게 줬을 지도 모른 잘못에 의해서 나도 가해자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러한 자기반성은 나중에 좀 더 시간을 들여서 하고, 지금은 난 왜 '성폭력'이 왜 그리 나쁜 것인지, 아니 그보다는 왜 그리 피해자들에게 트라우마를 주는지 하는 궁금증이 든다.
일단 폭력은 일반적으로 물리력을 포함하여 완력적인 힘 혹은 그런 힘을 행사하는 행위이고, 성폭력은 그러한 폭력이 '성'의 문제와 관련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약간 미국적인 기준을 들이다대면, 물리력/완력이 중요한 것 보다도 가해자가 우위에 있는 점(물리력 행사 능력 뿐 아니라, 사회적 지위도 포함)을 이용해서 강제로 윤간을 하려 하거나 성적으로 불쾌감을 주는 행위를 했을 경우 sexual harassment라고 한다. 물론 sexual harassment는 sexual violence보다는 훨씬 mild한 어감이지만. 하여간 중요한 것은 (물리적 혹은 비물리적 힘)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의 자유의지에 반하여 그 사람으로부터 성적인 즐거움을 취하려 했을 때 그것이 성폭력이라고 하면 맞을 듯 싶다.
다시 말해 여기서 빠질 수 없는 개념이 '힘'이라는 개념이다. 만약에 5살짜리 남자어린이가 예컨대 25살 여성과 성관계를 맺었을 경우, 그리고 25살 여성이 그걸 원하지 않았더라 하더라도, 그것이 남자 어린이가 여성을 상대로 행사한 '성폭력'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한 면에서 성폭력은 폭력의 범주에 포함되고, 폭력이 수반되지 않는 성폭력이 있기 어렵다는 데에 다른 사람도 동의하는 지 먼저 궁금하다.
그러면 폭력과 성폭력이 있을 때 그 죄질이 다르다면 아마 '성'이라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무언가 특수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라는 것에 내 인식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가 두번째 내 궁금증이다.
조금 더 명백히 하기 위해서 폭력을 먼저 생각해보자면, 우리가 자라면서 학교에서는 수많은 폭력이 있다. 학생이 학생을 상대로 서로 싸우는 것이 저학년의 패턴이라면 고학년이 되면서 학교에서는 '주로 폭력을 행사하는 자'와 '주로 맞는 자'가 존재한다. 그 뿐 아니라 교사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도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 학교를 다닌 대부분의 사람은 그러한 폭력에서 가해자이거나 피해자였던 경험이 대개 있을 것이다.
물론 학교폭력은 안된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8살때 학교에서 당한 폭력으로 20년동안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거다. (물론 있다.)
한줄요약: 성폭력이 특별한 것은 성이 특별하기 때문인데, 잠재된 죄의식이 트라우마를 트리거하는거 아닐까? 나도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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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3/15/2010
제목: 분노가 지배하는 사회
내용:
한국에서 요새 또 성폭행 후 살인 사건으로 시끄럽고, 이전 비슷한 사건들을 언급하면서 인터넷에는 과격한 말들이 오가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런 것이 인터넷의 젊은 학생들만의 여론이 아니라 국민 전체의 여론으로 보이는 것이 헌법재판소에서는 사형 합헌 판결이 났고, 그리고 여론조사에서도 사형제도 찬성이 90%가 넘고 현재 사형수들을 집행해야 한다는 의견이 80%가 넘는다는 기사가 떠다닌다. 한국에서 그 10%가 안된다는 사형 폐지론자로서 나는 한국 민중을 지배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분노'라는 것에 아주 마음이 아프다.
사람의 생명은 사람의 기술로 창조하기 어렵고 (다른 생명도 마찬가지지만) 더구나 사람은 (관념론적인 관점에서) 스스로 그 안에 세계를 구축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천부인권이라는 게 존재하는 것이다. 아 물론, 우리가 '인'이기 때문에 '인권'만을 주장하는 것이긴 하지만 우리가 추구해야할 방향이 포괄적으로 인권이 존중되는 사회다. 역사적인 서술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각자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서 국가와 사회를 형성한다. 관점에 따라 생각하는 것이 다를 수 있는데, 나는 분명히 '개인이 있고 이후에 사회를 구성했다'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사회를 떠난 인간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개개인의 인권을 지키는 것이 사회를 이루는 가장 지상 과제가 될 것이고, 내 생각에 공공의 안전보장이 개인의 인권보다 우선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사회를 이루고 살아간다는 것은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이 특정한 절차에 의하여 (정치 시스템) 타협을 하고, 그 룰에 동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가장 큰 문제에 도달하는데, 민주주의라는 절차는 그 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결국에 동의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이루는 사회에, 그에 속할지 속하지 않을지 하는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는다는데 기인한다. 대한민국, 혹은 다른 어떤 국가체제의 공권력이 그 영토 내에 존재하는 한,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그 룰은 사실 자신이 동의하지 않아도 따라야 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사회는 그 룰을 따르지 않기로 한 사람을 (사회의 안전을 위하여) 격리하고 싶어하는데 그 수단이 '구속'이 되고, 극단적인 형태로 '종신형'이 있을 수 있다.
격리의 가장 영원한 형태는 '종신형' 혹은 '무기징역'일 수 있는데, 그보다 한단계 더 나아가 '사형'이라는 제도를 생각하는 것은 나에게는 '분노'의 감정을 더한 것 이상으로는 잘 생각이 되지 않는다. 또한 파렴치한 범죄자는 고통스럽게 죽여야 한다거나, 그 자들을 자신의 세금으로 먹여살리기 싫다는 리플에서 보여지는 가장 큰 감정 역시 '분노'이다. 어떠한 잘못된 행위를 보았을 때 분노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인지상정이나, 그 분노의 감정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은 또한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이라 생각한다.
유토피아적인 이야기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선과 악이 뒤섞여있는 경우를 많이 본다. 최근에 내가 가슴아프게 알게 된 이야기는 2002년 스위스 상공에서 DHL의 수송기와 러시아의 한 민항기가 공중충돌한 사건이다. 수십명의 인명이 희생된 것의 원인은 관제사의 실수였는데, 관제사는 당시 레이더와 전화선이 수리중인 와중에 여러대를 혼자 관제하고 있었다. 결국 그가 그 중 한 대의 비행기에 잘못된 명령을 내려 충돌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2년 후 그는 유족 중 한명에 의해 살해된다.
한줄 요약: 나 사형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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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8/4/2010
제목: 본격 애플 까는 글
내용:
제목은 저렇게 썼지만 그보다 이건 내가 왜 애플을 싫어하는 이유에 대해서, 그리고 왜 그 회사의 미래를 밝게 보지 않느냐에 대한 글이다.
지난 안테나게이트에서 잡스는 '우리는 소프트웨어 회사다'라고 얘기를 했는데, 이것은 잘못된 말이다. 분명히 말하자면 애플은 하드웨어 회사다. 애플의 제품을 써보면 분명 '소프트웨어는 괜찮은데 하드웨어는 별로다'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어떤 회사가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를 잘한다고 소프트웨어 회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애플은 하드웨어 회사인데,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를 잘 한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경우는 키보드와 마우스의 품질 면에서는 정말 훌륭한데 그렇다고 키보드와 마우스를 파는 회사는 아닌 것과 같다.
애플이 왜 하드웨어 회사냐, 소프트웨어를 팔지 않기 때문이다. 애플의 소프트웨어 팀은 애플의 하드웨어 팀에게만 소프트웨어를 판다. 예를 들어 애플의 OS를 보면, 애플은 OSX를 다른 하드웨어 회사에 팔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애플의 소프트웨어는 기본적으로 애플의 하드웨어를 위해 존재한다.
마이크로소프트와 IBM이 컴퓨터 산업계에 크게 공헌한 바는, 그들이 '범용' 컴퓨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IBM이 IBM PC의 표준을 제시하고 (표준만 제시하고), 마이크로소프트가 많은 하드웨어를 지원하는 소프트웨어를 만들면서 비로서 경쟁이 시작됐다. 물론 마이크로소프트가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반경쟁 행위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하드웨어 분야에서 경쟁을 촉진시킨 것은 큰 업적이다. 경쟁이 시작됨으로서 드디어 부품의 가격이 낮아지고 전자장치의 가격이 크게 낮아지게 되었다. 물론 트레이드오프가 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모든 하드웨어를 지원한다는 것을 표방하고 제품을 만들기 때문에 독특한 방식으로 만든 제품의 경우 문제가 있었다. 모든 업체들이 같은 가정 하에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인 일이다.
하지만 가격의 하락은 정보가 힘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시대에서 정보의 보급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애플은 경쟁에 동참하지 않음으로서 자신들의 높은 가격을 유지하고 있는데, 정보의 보급, 가난한 자의 정보 그런 화두에 관심이 없는 기업이 아니라면 시장의 미아너리티로서 쓸 수 있는 전략에 불과하다.
사실 많은 애플의 '장점'은 이 회사가 시장의 마이너리티이기 떄문에 가능한 것이 많다. 예를 들어 보안의 경우는 애플의 OSX는 알려진 보안 헛점을 몇년이 지나도 잘 고치지 않기로 유명한데, 그러고도 MS보다 보안에 강하다던지 그런 헛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유는 OSX가 시장지배자가 아니라서 해커들이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디자인의 경우에도 많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가끔 보이면 쿨하다던지 예쁘다던지 그런 소리를 듣는 거다. 아이폰을 보면 이제 아이폰보고 누구도 쿨하다거나 예쁘다거나 그러진 않는다. 오히려 너무 흔해빠져서 지겹다는 얘기도 들리지 않는가.
다시 애플은 하드웨어 회사라는 얘기로 돌아가서,
한줄요약: 나 애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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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이정도
IK
Monday, November 01, 2010
오랜만에 포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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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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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November 01,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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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February 26, 2009
사람의 손/발가락은 5개?
지나가다가 이런 기사를 봤다.
http://cynews.cyworld.com/service/news/ShellView.asp?ArticleID=2009022611593884167&LinkID=2&lv=0
난 저 연예인이 뭐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고 그 사람 발가락이 5개인지 6개인지 그다지 관심은 없는데, 이거 하나는 쓰고 싶어서 그냥 짧게 쓴다.
다지증(Polydactyly)은 사람한테 가장 흔한 기형(?)중 하나이다. 사실 奇形이라는 것이 그저 기이한 형태라는 뜻이고 political correctness를 추구하는 입장에서 그저 일반적이지 않은 단백질 발현의 결과로 봐야하는 것이 아닌가. 링크한 위키피디아 사이트에서는 "The condition has an incidence of 1 in every 500 live births."라고 하지만 내가 본 구글 서치 결과 중에서는 1/400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내 외할머니 밑으로 자손이 모이면 100명은 쉽게 넘는데 그중에 손/발가락이 다섯개 이상 있는 사람이 있을 확률이 1/4이 넘는다는 이야기다. 우리 학교 다닐 때 한학년에 보통 500~1000명 하지 않나? 그중에 분명히 한명 이상 있을 만 하다는 이야기. 뭐, 기이한 것이 문제가 되는 세상도 잘못된 거지만 1/400의 확률은 '기이'의 축에 끼지도 못한다는 거다.
그냥 그렇다고. 어떤 여성 연예인 발가락이 5개냐 6개냐 하는 기사는 내가 봤을 때 그 연예인 시력이 1.5냐 1.0이냐 하는 수준의 기사로 보인다는 거다. 차라리 지능을 결정하는 단백질이 대통령이 태아일 때 제대로 발현되었느냐를 따지는 게 더 '기사'로서는 어울리지 않나.
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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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February 26,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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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August 20, 2008
좋은 사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라고 내가 말하면, 과연 그것은 무슨 말일까?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며 과연 '좋다'라는 것은 어떤 말일까?
이 말들의 뜻이 명확하다면 아마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거 같다. 어떤 사람이 좋다 나쁘다를 이야기할 때 '무엇과 비교하여' 좋다 따위의 비교급에 초점이 맞춰지나, 아니면 절대적인 레벨이 있어서 그 레벨보다 위에 있으면 좋다고 판별한다거나 하는 기준이 있어서 과연 그 기준이 무엇이냐라는 데 논의의 초점이 맞춰지건 간에 '좋은 사람'을 정의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다만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하던, 특정한 기준에 비교를 하던, '좋다'라는 의미에서는 '대부분은 그러하지 않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좋은 사람'은 분명히 '보통의 사람'이 아니고, 따라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한다.
과연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은 무엇인가?
사실 지금 수준에서는 별 의미 없는 문제제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어떤 방향으로 생각해봐야 할 지조차 잘 모르겠으니까.
사실 이런 생각 자체가 일어나게 된 계기랄까? 그런게 뭐냐면 '나와 본의 아니게 적대관계(?)가 형성된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어떻게 해야 적절한가. 내가 우위에 있을 때, 내가 열세에 있을 때 각각 어떻게 행동해야 'nice guy'혹은 'cool guy'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라는 상황에서 였다.
예전에 초등학교때 실잠자리를 가지고 놀다가 그것이 죽어가는 모습을 밤 새 지켜본 적이 있다. 날개가 찢겨져나가고 나서 고통스럽게 다리를 아둥거리며 일어서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보면서 난 그 이후로 다시는 곤충을 이유없이 죽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몇주 전 짜증이 곤두선 내가 곤충을 세마리인가 죽이고 나서 그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했을 때 'Stay Cool'이라는 답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이 문단에서 쓰인 'cool'과 이전 문단에서 쓰인 'cool'이 같은 의미를 가질 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아닐 수도 있겠지만 아주 연관이 안되진 않을 수도 있을 거 같다.
지금 당장 어떻게 써야 할 지도 모르겠고, 질문 자체가 무엇인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차후에 잊지 않기 위해서 글로 남긴다.
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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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August 20,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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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June 10, 2008
자신과 다른 사람을 보는 관점
예전부터 가져왔던 궁금증 중 하나는, 과연 내가 다른 누군가에게 "그건 나를 잘 몰라서 하는 소리야"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하는 것이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이 어떤 대상을 관찰할 때는 그 오감의 레벨에서부터 그 사람의 선입견이 작용하는데, 자신이 자신을 바라본다면 역시 자신이 원하는 스스로의 모습이라는 선입견의 지배를 받을 것이라는 거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너는 이러이러해" 혹은 "이러이러해 보여"라고 했을 때 그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과 다를 지라도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결론을 내지 못한 open question으로 남겨놨다.
최근에 Science에 이러한 철학적 질문에 실마리를 남기는 심리학 논문이 나왔다. 정확히 말해서 Review article이다.
Emily Pronin, "How We See Ourselves and How We See Others", Science, 320, 1177
논문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생각할 때는 우리가 실제로 생각하는 바와 주변 상황들을 직접적으로 인식하지만,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그러할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을 인식할 때는 직접적으로 시신경에 의존할 수 있지만,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는 거울을 이용하지 않는 한 밖으로 나타나는 행동을 관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My Thoughts, Your Behavior"라는 소제목으로 요약이 되는데,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교통 체증 때문에 job interview에 늦었을 때, 본인은 '늦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나 주변 상황(situational constraints라 표현)에 의해 늦게 되었다'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것보다는 결과론적인 행위 자체에 더 집중한다는 것이다.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저자는 어떤 사람이 자신을 돌아볼 때 특징되는 현상을 몇몇 가지로 예시를 제시한다. 스스로의 능력을 과대 평가하는 능력이 있다는 positive illusions. 자신은 다른 사람에 대해 잘 알지만 다른 사람은 나에 대해 잘 모른다고 생각하는 interpersonal knowledge의 측면 등등을 제시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스스로를 객관적이로 공정하다고 판단하는 반면,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많다라는 이야기다.
페이퍼에서는 자신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것처럼 역지사지의 자세로 다른 사람을 보라거나, 다른 사람이 자신에 대해 평가하는 것을 중요시 여기라거나 하는 식의 moral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moral이 없어도, 이러한 비대칭성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inference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스스로 바라보는 것은 절대로 객관적일 수 없으므로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내 평소 생각이었고 서두에도 썼기 때문에 다시 쓰진 않겠다.(고 해놓고 다시 썼지만...) 당위성에 대한 의문은 접어둔 채, 오해라고 말하기 전에 거울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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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June 10,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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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April 23, 2008
될 놈은 뭘 해도 되는가?
최근(이래봤자 몇 달쯤 전)에 S. Grossmann의 리뷰논문(Rev. Mod. Phys. 72 603)을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다. 16페이지밖에 안되고(물론 일반 페이퍼에 비해서는 길다), 리뷰 논문이라는 것이 전체적인 흐름을 잡아주는 것이지 세부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디테일이 빠진 것이 많았다. 저자가 적어놓은 몇몇개의 수식이 trivial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이에 빈 공간을 채워넣는 작업을 했고, 그것에 대해 그룹 사람들을 상대로 talk을 한 적이 있었다.
/* 여기서 잠깐, 한국말이라고 하기 민망한 부분 */
내용이라면 뭐였냐면, vector로 표현될 수 있는 states의 time evolution operator를 matrix representation을 가질 때 이 matrix가 hermitian하지 않으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operator의 eigenvector들이 orthogonal하지 않을 뿐 아니라 eigenvalue들이 일반적으로 실수로 표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2차원 벡터의 경우, 매트릭스는 2 by 2 로 표현될 것이고, 두 eigenvector는 orthogonal하지 않을 것이며, eigenvalue 두개 또한 일반적으로 복소수가 된다. 그래서 일반적인 vector를 이 operator에 따라 time evolution을 시킬 때 두 eigenvalue의 실수부가 0보다 작아서 exponential decay가 일어나더라도, non-orthogonal basis coordinate에서의 phase difference때문에 아주 짧은 시간 동안 transient amplication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말로 써놓으면 간단해 보이는데, 사실 그렇게 수식 전개가 간단하진 않았다. 아, 해놓고 보면 간단한데, 달랑 논문에는 결론만 써놓으니까 그걸 확인해본거다. 하여간에 그 과정 중에 하나가, 일반적인 Cartesian coordinate에 있는 vector를 이 operator에 따라 time evolution시키려면, 이 vector를 앞서 구한 operator의 eigenvector의 span으로 decompose한 다음, 각가의 성분을 각각의 eigenvalue로 time evolution시킨 다음에 그걸 다시 원래의 orthogonal한 Cartesian coordinate으로 되돌려오는 작업이 있었다.
나는 그걸 말 그대로 노가다로 풀었다. 일반적인 벡터의 두 x,y component를 잡고, 그걸 eigenvector basis로 바꾼다음에 각가에 time evolution operator를 곱해준 다음 다시 expand해서 원래 coordinate으로 되돌려와서 두 vector를 시간의 함수로 구했다. 그랬더니 논문의 결과와 정확히 같은 결과가 나왔다.
이후에 같은 연구실의 노교수님(Dr. Goldburg, 작년에 80세 생신잔치를 하셨지만 아직도 매우 active하게 연구하고 계신다)가 오시더니, 나한테 하시는 말씀이,
"일두야, 내가 니가 한 계산을 나름 해 봤는데 이상하게 논문하고 싸인이 뒤바뀌어서 나오는구나. 내 계산을 한번 보지 않으련"
해서 봤더니, 이 분은 내가 계산한 노가다방법과는 다르게 dy/dx+P(x)y=Q(x) 꼴로 나타나는 1st order non-homogeneous differential equation을 만드셨다. 이러한 형식의 방정식의 일반해는 널리 알려져있기 때문에 일단 그런 형식으로 바꾸기만 하면 solution은 바로 나온다. 하여간 나는 사실 그 식을 보고 그런 식의 접근방식을 떠올렸다는게 새삼 놀라웠다. 역시 그분이니까 가능한 어프로치였다고 생각한다. 주어진 방정식을 보고 그것이 가장 일반적일 형태를 유추하여 이를테면 linear algebra를 analysis로 바꾼 거다.
근데 문제는 solution이 논문과는 좀 다르다는 거였다. 중간텀의 부호가 바뀌어서 나왔는데, 머 결국 그 교수님의 답이 틀린 것으로 확인된게, 그 solution을 original equation에 넣고 풀면 만족이 안된다. 그런데 물리적으로는 그분의 방법이 전혀 이상한게 없다는 게 문제인 것이다. 일단 PDE를 푸는 과정에서 틀린 것이 없고, 답을 변환된 PDE에 넣으면 등호가 성립한다는 것은, matrix equation을 PDE로 옮기는 과정에서 우리가 모르는 뭔가 틀린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아직 그게 뭔지 깊이 확인해볼 시간은 가지지 못했다. 어차피 답을 구했기도 하고, 사실 다른 프로젝트가 더 바빴기 때문에 더 이상 신경을 쓰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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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한 몇주 전에 써놓고 더 이상 쓰지 않은 부분이다. 아예 오늘 맘 잡고 끝을 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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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queness of physical solution independent of mathematical representation
하여간 그때 저러한 일로 인해 곧이어 든 생각이, 어떠한 수학적 representation을 사용하더라도 우리가 보는 physics는 변하지 않는다. 단순한 math technic이나 representation이 아니고, 하다못해 formalism이 달라도 우리가 보는 physics가 같으면 결국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이를테면 양자역학에서 슈뢰딩거 방정식과 하이젠버그 방정식은 완전히 다른 형태이다. (보통) 슈뢰딩거 방정식은 2nd order PDE의 형태로 쓰고 아무래도 하이젠버그의 경우는 matrix또는 commutor의 형태로 방정식을 구성하는게 보통이고 시간에 대한 미분 하나만 있을 뿐 2nd order PDE로 나타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두 경우는 사실 같은 경우다. 같은 physics를 보면서 다만 time의 reference frame을 다르게 잡았을 뿐이다. 고로 observable이나 eigenfunction은 두 경우 모두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지만 결국 physical reality와 관련된 부분 - eigenvalue -는 항상 변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어떤 변태가 실린더처럼 생긴 물체를 spherical coordinate에 대해 솔루션을 만든다 해도 무지 복잡하긴 하겠지만 결국 함수가 나타내는 꼴은 같을 것이라고 우리는 기대한다.
여기까지 생각이 도달한 나는 다른 경우를 생각해냈다.
Poincare-Bendixon theorem이라는게 있는데, 물리적으로 말하는 것은 2차원 이하의 phase space에서 chaos가 일어날 수 없다는 이야기지만, 수학적으로 보자면 어떤 시스템이 2차원이고 continuous하다면 결국엔 어떠한 궤적도 점 혹은 원으로 수렴한다는 것이다. 물리에서는 많은 시스템들이 '초기조건'과 관계 없는 어떠한 '결국 시스템이 흘러가는 방향'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마 그렇지 않은 경우는 stochastic behavior를 보인다고 하기도 한다. 하여간 모든 linear deterministic system은 초기조건에 상관없는 asymptotic behavior를 가질 가능성이 매우 많다. 진자의 운동도 보면 마찰력을 고려하면 점점 줄어들어 정지상태가 되겠고, 마찰력이 없다 해도 phase space에서 limit cycle을 보일 것이다. 이러한 수렴하는 솔루션의 특징은 stable하다는 것인데, 솔루션에 대해 미세한 변화에 대해 항상 restoring force가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 물리에서 가정하는 모델 시스템들이 이러한 상황을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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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l Life
그리고 나서 든 생각이, 만약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알게 되거, 드디어 종국에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있는 방정식을 세운다면 과연 이것이 그러한 limit cycle을 예측할 수 있느냐는 거다. 자 여기서부터는 물리가 아니라 그냥 단상의 레벨로 내려오는데...
될놈은 되는가?
'될놈설'이라고 있다. 누가 주창했는지는 명확치 않으나, 학부 시절에 많이들 이야기했던 theorem이었던 것 같다. 무슨 내용인 즉슨 하니,
M군이 F양한테 프로포즈를 한다. 그런데 어떻게 프로포즈를 해야할까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현명한) 누군가가 다가와서 '니가 어떻게 프로포즈를 해도 될놈이면 되고, 안될놈이면 어떻게 프로포즈를 해도 안돼' 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될놈설'이 말하는 바는 '될놈은 뭘해도 되고, 안될놈은 뭘해도 안된다'라는 것이다. 근데 이 theorem은 실제 상황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는 매우 강력하다. 사실 F가 M을 좋아한다면 M이 부끄럽게 겨우 이야기를 꺼내도 둘은 결국은 잘 됫이고, 아마 M의 사소한 실수들은 그냥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반면 F가 M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면 M이 아무리 화려한 이벤트를 만들어도 결국은 그냥 '오바쟁이', 불운한 경우 '스토커'가 된다는 것이다.
결국 될놈설이 말하는 것은 어떠한 초기조건을 선택하던 간에 결국 흘러가는 방향이 있다. 즉 그러한 종류의 문제를 포뮬레이션 하면 '초기조건에 대한 민감성'따위가 들어갈 구멍이 별로 크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theorem은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될놈'인지의 여부의 진리함수를 f라 하면 f=f(M,F)이고, 어떠한 M,F의 조합에 대해 함수 f가 true를 return할지는 실제로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판정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이론은 예측력이 없는 이론이다. 하지만 현상론적으로는 아주 훌륭한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 될놈설이라는게 남녀관계에서 자신이 통제할 수 얼마나 없는지에 대한 반쯤 농담 반쯤은 진담으로 하는 얘기이다.
될놈설의 실체는 단순히 언어의 오용이다.
물론 '될놈설'을 농담거리 이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만은, 확실히 해주고 싶은 것은 될놈설이라는 것은 '될놈'이라는 단어를 교묘하게 재정의 하는 말장난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될놈은 뭘 해도 된다'라는 것은 '된 놈은 과거에 될 놈이었다' 혹은 ''될놈'은 '된 놈'의 과거의 상태이다'라고 재정의해주는 말장난일 뿐이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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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전히 환상은 남아있다. 탄호이저가 볼프람에 비해 다른 점이 무엇인가? 결국 탄호이저는 '될놈'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탄호이저의 노력 때문도 아니다. 바그너의 악극에 공통적으로 들어있는 인종주의적 영웅의 모습이 연상될 수도 있지만, 사람들은 그러한 주어지는 행운에 대해서는 매우 환상을 가진다. 하지만 이러한 기만적인 될 놈은 뭘 해도 된다라는 식의 모델은, 물리에서처럼 linear deterministic approximation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될놈설에 의지하여 맘을 편히 가지며 시간의 흐름에 인연을 맡겨나가고 있지만, 그런 식으로 내가 정말 원하는 걸 얻지 못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물리현상에서도 linear하게 solvable case는 극히 드물다.
될 놈은 뭘 해도 된다. 왜냐면 그가 될 놈이라고 정의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가 될 놈인지 예측하는 것과 어떻게 '안될 놈'을 '될 놈'으로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물론 '내가 이런 문제의 답을 찾아낼 놈'이면 이 문제의 답을 찾아내겠지만 말이다. 될 놈을 뭘 해도 된다지만, 누가 될 놈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는게 문제다.
IK
어찌보면 '될 놈이라고 믿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이곳을 떠나는 게 전혀 슬프지 않을 때가 있다. 언젠가 다시 '만날게 될 사이'라는 느낌이 들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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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November 15, 2007
괴델과 콰인
철학에서 수백, 수천년 동안 많은 이야기가 오고갔지만, 모든 주제가 나한테 흥미롭지는 않았다. 주로 난 1900년 이후의 경험주의자들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었지만 경험주의자로 분류하기 어려운 사람들도 몇 있다. 예를 들면 괴델과 콰인인데,
일단 괴델의 생각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incompleteness'인데, 내용인 즉 '공리로부터 출발한 논리적 이론에는 참인지 거짓인지 증명할 수 있는 명제가 존제한다', 혹은 '어떤 이론이 공리로부터 출발했다면 그 이론이 완전한지 증명할 수 없다' 정도 될 거 같다. 버틀런트 러셀이 수리논리학을 정립한 이후로 논리학이라 함은 거의 수학과 동일한 학문으로 취급되는데, 이를테면 수학의 경우, 우리가 수학의 체계로 증명할 수 없는 몇가지의 공리를 가지고 있다. 괴델도 사실 이 공리들이 참임을 증명하려 했다가 불완전성 정리를 내놨지만. 하여간 그 공리들이라는 것이 여러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으로 이해가 쉬운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들을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1. 평면 위에서 두 점은 한 선분을 결정한다.
2. 선분은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
3. 한 점을 중심으로 하고 다른 한 점을 지나는 원은 존재한다.
4. 모든 직각은 같다.
사실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는 하나가 더 있는데 다른 네개보다 복잡하니 생략했고. 이 네개의 공리는 우리가 직관적으로 생각했을 때 옳을 거 같지만 사실 증명되지 않았다. 유클리드는 이 네가지의 공리로 출발해서 28개의 theorem을 만들었다고 한다.(출처 까먹음) 우리가 참이라고 믿고 있는 수학의 시스템이라는 것이 사실은 아무도 그것을 증명할 수 없는 '가정' 몇개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면 참 불안한 일이다. 사실 저 네개의 가정은 아주 큰 돌덩이라서 쉽게 무너지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저러한 가정을 부정하여 만들어진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까지가 괴델에 대한 이야기고, 콰인은 경험주의자들의 착각에 대해 지적을 했는데, 그의 주장은 '원론적으로 번역이 불가능하다'라는 이야기다. 콰인이 말하는 '번역'이라는 것은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한다거나 하는 저차원적인 이야기가 아니고(콰인이 든 예중에는 그것도 있었지만), 각각의 사람이 나름의 '언어'를 가지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이 본질적으로 정확한 소통을 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비트겐슈타인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면 아무래도 언어에 내재된 본질적 불명확성을 지적했겠지만, 콰인이 말하려 했던 것은 그런 것보다는 본질적 경험주의의 한계였던 거 같다. 관념의 범위가 언어의 범위보다 크다는 식의 이야기는 아니고. 이를테면 어떤 언어의 해석이 관념의 영향을 받는다는 그런 이야기다. 영어와 원시종족언어 사이에의 번역 불가능성으로 시작해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는 식으로까지 확장된다.
사실 오늘 내가 쓰려고 했던 것은, 이런거와는 또 다른 이야기인데, 아무래도 관련이 없지는 않지 싶어서 서론을 좀 길게 썼다. 이를테면 '색맹의 파라독스'같은 문제인데, 만약 어떤 사람이 파란색을 붉게 보고, 붉은 색을 파랗게 본다면, 그가 색맹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다시 말해, 내가 어떤 색을 보고 저게 '붉은거다'라고 배운 이후에 그 색을 가르키면서 '붉다'고 이야기하면서 다른 사람의 동의를 구할 때, 그도 자연히 그가 '붉다'고 배웠기 때문에 '붉다'고 하는 것이지 실제로 그와 내가 동일하게 인식한다는 것에 대한 보장이 없지 않느냐는 거다. 이런 문제는 어떤 관찰결과나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할 때 말하는 대상에 대한 본질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념과 그 관념을 정의해준 과정에 더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는 인식론에 보다 가까운 이야기일 수도 있다. 다르지만 또 비슷한 이야기로 '사악한 과학자의 역설'도 있다. 어떤 사악한 과학자가 밤에 세상 모든 사람들을 죽이고 뇌를 빼서 배양액 속에 넣은 후 전기 자극을 주는 것과 우리 실제 세계와 어떻게 구별이 가능할까? 마치 매트릭스와 비슷한 설정의 이 역설은 사실 답이 없다. 아직 풀리지 않은 역설이기도 하다. 예전에 나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으로 우리의 현실성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그것도 잘 모르겠다.
하여간,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수학적 공리체계가 불완전한 것 처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념의 체계 역시 상당히 불완전하다는 것이고, 그 관념 체계에 지극히 영향을 받는 우리의 이른바 오감과 관찰의 입장마저도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 컴퓨터에 타이핑을 하고 있지만, 내가 보고 있는 화면이 blogger.com의 화면인지, 내가 지금 내가 맘 속에 하고 싶은 말이 전달이 되게끔 쓰는 것인지, 아니면 사실 시시껄렁하게 웹서핑을 하고 있는데 내가 착각하고 있는 것인지, 정말 그 바닥에서는 구분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나의 존재 자체도 신앙의 영역에 들어간다. 나는 정말 내가 존재하는 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데카르트는 사유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에서 자신의 존재의 근거를 찾았던 모양인데, 나는 내 안에서 진정 새로운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나는 내 존재의 근거를 찾기도 쉽지 않다.
물론, 일상 생활에서 내가 자아를 잃어버린 듯한 광기를 보인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기본적으로 우리는 누구나 어떤 형태로간에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경험, 그리고 그로부터 나온 느낌, 그리고 스스로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 그런 것들에 너무 확신을 가지기에는 불완전한 요소가 너무 많다.
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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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October 28, 2007
R. Rorty
Richard McKay Rorty, October 4, 1931 – June 8, 2007
http://en.wikipedia.org/wiki/Rorty
http://www.nytimes.com/2007/06/11/obituaries/11rorty.html?_r=1&ex=1339214400
http://www.stanford.edu/~rrorty/
"The world does not speak. Only we do. The world can, once we have programmed ourselves with a language, cause us to hold beliefs. But it cannot propose a language for us to speak. Only other human beings can do that." -Richard Rorty-
예전에 철학책 좀 많이 읽을 때 거의 마지막으로 당도했던 철학자이다. 나의 경우는 파이어아벤트를 거쳐서 로티를 읽은 것으로 기억한다. 게다가 저서를 직접 읽지는 않고 그냥 개론만 읽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사실 독서를 한 지가 오래돼서 정확한 내용을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로티는 이른바 Neo Pragmatism의 선두주자로서, 시간의 변화에 대해 가치판단을 하는 것에 대해 근본적으로 비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과학철학(여기서 과학이라 함은 모든 종류의 '학문'을 말하는 철학적 용어이다.)의 흐름을 보면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의 모든 문제는 언어의 비명료성 때문이다'라고 분석철학의 화두를 제시하고, 칼 포퍼와 토마스 쿤이 각각 반증주의와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을 만들어서 과학를 '진리접근성'보다는 '예측가능성'의 관점에서 보기 시작한다.(여담으로 나는 포퍼주의에 별로 동의하진 못한다. 그 이유는 나중에 한가해지면...) 그 이후에 파이어아벤트와 라카토슈가 포퍼주의와 쿤의 패러다임 개념을 섞어가면서 서로 반대방향으로 나가는데 나는 라카토슈보다는 파이어아벤트에 더 관심이 있었다. 파이어아벤트는 쿤의 이른바 '공약 불가능성'에서 한발짝 더 나가서 '과학적 방법론'이라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으니 그냥 그때그때 알아서 하면 된다는 식의 주장을 펼친다.
로티도 이쯤 어딘가에서 시작하는데, 그의 프래그마티즘-실용주의-가 정확히 파이어아벤트의 아나키즘과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도 비슷하게 '하여간 좋은게 좋은거다' -_- 식의 주장을 한다. 다시 말해서 과학적 방법론이 '진리'인지 아닌지는 하여간 신경 안쓰는데, 그게 과학의 목적에 맞게 '예측력'을 가져서 사회에 도움이 된다면 그걸로 된거다..라는 이야기다.
나는 97년 과학고를 들어가면서부터 과학 시스템이라는 것에 심각한 의문을 가졌는데, 쿤, 포퍼, 비트겐슈타인, 파이어아벤트를 거쳐서 로티로 오면서 과학이 '진리'를 말하는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며, 우리의 오감과 더불어 논리와 수학적 공리 시스템 자체를 믿는 것도 사실 종교를 믿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여러 이유로 종교를 믿는 것이 약간 ridiculous한 면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쉽게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atheist싶지는 않은 이유다. 기본적으로 나는 agnostic이라고 생각한다.
뭐, 이러한 과학철학의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가 진리에 대해 받아들이는 방식이 당연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세상의 뿌리깊은 많은 생각들을 바꾸는데는 많은 철학자들이 있었고, 아래 쓴 글에서 나는 역사의 진보를 믿지 않는다고 했지만 한 한가지의 진보를 이야기하고 싶다면 '많은 사람들이 모든 종류의 억압에서 자유로와지는 방향'이라고 할 것이다. 로티가 20세기 후반 영미권 철학에서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책을 통한 대화로 나름 나만의 생각을 가질 수 있게 도와주신 분인데 6월에 돌아가실때 생각없이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죄스러워 글을 하나 남긴다.
IK
"There is nothing deep down inside us except what we have put there ourselves." -Richard Ror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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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October 04, 2007
Colorless green ideas sleep furiously.
예전에 황우석 사건과 관련하여 비트겐슈타인을 돌아보는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이전까지 거의 완전하게 논리주의자였던 나는 내용과 무관하게 절차적, 혹은 논리적으로 완벽한 무언가를 찾고 있었고, 이런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사상과 비슷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사상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지 말라'도 대변되는되는데, 마치 논리성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애매모호한 언어는 적합하지 않다는 식으로 내가 이해하고 있었던 거 같다. 상황논리에 따른 ad-hoc을 배격한다는 점에서 연관성이 있긴 하지만 밀접한 연관성은 지금도 여전히 찾을 수가 없다.
하여간, msn을 최근에 켰을 때 아는 분의 대화명이 'Colorless green ideas sleep furiously'였다. 이 문장은 언어학의 대가이면서도 그거보다는 좌파 반미주의자 미국인(난 그런 평가에 동의하지 않지만)으로 알려져버린 노암 촘스키가 그의 저서에서 일전에 인용한 내용으로 문법적으로 완벽하지만 말이 안되는 문장의 예로 쓰였었다. 촘스키 이전의 언어학과 이후의 언어학이 크게 달라지는데, 촘스키의 breakthrough는 단순 통사론에서 벗어나 의미론을 보기 시작했다는 데에 있다. 이전에 언어학은 기계적 인간관에 기초하여 사람이 만드는 문장을 구조적으로 파헤치고 (주어+동사+목적어) 그 문법에 맞는 문장을 사람이 만든다는 내용이었지만, 촘스키는 생성문법이라는 주제를 도입하여 아이들이 언어를 배우는 과정과 더불어 사람이 창조적으로 언어를 습득한다는 그런 이론을 펼쳤다. 아이들이 언어를 배우는 과정을 참고한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의 모티브와 정확히 일치한다.
일반적으로 상대주의자들이 절대 기준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나치게 구조적 대칭을 이루는 논리성에 치중하는 면이 있다. 왜냐면 논리적으로 완벽하지만 옳지 않은 문장...의 경우를 상상하려면 전제가 옳지 않았다고 해야하고, 그렇게 되면 '옳지 않은 전제가 존재한다'라는 아주 불편한 전제가 생성되어버린다. 나도 그러한 사람 중에 하나일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또 그게 지나치다보면 구조성에 대한 맹신이 되어 상대주의자, 진정한 좌파들의 필수요건인 개인 한사람 한사람에 대한 존중의 정신이 결여될 수 있다. 그러한 면에서 엄밀한 의미에서의 사상구분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하여간 원래 주제로 돌아가서, 예전에 황우석으로 인해 비트겐슈타인을 돌아보게 만들었던 그 주제로 돌아가면, 전제나 외부적 상황 없이 완전히 논리적인 과정이 존재할 수 있는가? 하지만 촘스키의 아이디어를 살짝 보면 colorless green ideas sleep furiously라는 문장은 확실히 의미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어떤 말을 할 때, 전제와 상황으로부터 그 말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완전히 논리적이라고 한다면, 그 말은 확실히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여전히 특정 전제와 상황에 대해 '옳지 않다' 혹은 '의미가 없다'라고 우리가 쉽게 평가를 내릴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촘스키의 문장을 볼 때 저 문장에서는 전제간의 모순이 있다. 예를 들면 저 문장의 전제는 'Ideas' color is green', 'ideas' is colorless', 'idea can sleep' 등등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전제들을 엮는 과정을 완전히 논리적이나, 전제간 모순이 이 문장이 말이 안되게 한다!
여기서 답이 나왔구나.
'잘못된 전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서 완벽한 논리에 의해 의미가 없는 결론이 도출되었을 때 그 이유는 '전제가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여러 전제들이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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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May 23, 2006
황우석과 비트겐슈타인
황우석 사건을 계기로, 논리적 절차와 전제에 대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황우석과 MBC의 대결 양상으로 사건이 전개되던 시절의 이야기인데, 황우석이나 MBC에 대한 개별적 평가나 그들이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었냐는가와는 별개로, '언론이나 다른 과학적 일반인이 그들이 가진 권력을 이용하여 과학자의 연구 성과의 진위여부를 의심하는 것이 정당한가'라는 고민이었는데, 역시 과학자도 연구성과에 따라 권력화가 된 입장이기 때문에 권력 vs 권력으로 이것은 정치적인 싸움이 된다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리고 '연구성과의 진위여부'라는 것에 따라 이것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지금까지 전제와는 상관없이 논리적 과정만 중시하던 비트겐슈타인 류의 상대주의 철학적인 생각을 하고 있던 나한테는 상당히 충격적인 생각이었다. 하지만 바꾸어 생각하면, 그동안 지나치게 절대적 절차적 논리에 대해 믿음을 가져왔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쉽게 진보, 보수 혹은 절대주의, 상대주의 하지만 실제로 그러한 구분조차도 실재하지 않는다. 정치적 논쟁이야 원래 결론이 없고 결론이 난다 하더라도 실제로 민초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게임이라는 것이야 뻔한 이야기이지만, 철학적 이야기에서도 그러한 허무주의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이 두려운 것은 사실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전기 철학의 집합체적인 책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의 마지막 문장을 통해 언어의 명확성을 강조하며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고 했다. 이 말은 언어의 이중성을 방지하고 싶은 분석철학자의 발언이기도 했지만, '세계는 실재하는 것들이 아니라 사실의 총체'라고 했던 위대한 철학자의 결론이기도 했다. 비트겐슈타인이 첫번째 저작을 마치고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점차로 이상언어를 포기하고 일반언어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황우석과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연상되는 것 사이에는 논리적 연관성이 있을까?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해도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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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May 23,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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