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y 28, 2006

Just taken.


Jupiter, 1:25am, May 28, 2006.

방금 막 찍고 몇분만에 후처리 대강 마친 사진. 조만간 wiki에서 다른 사진도 후처리해서 올릴 예정.

Edit: 1:30am EST, June 1, 2006
좀 더 잘 해서 위성까지 나온 것까지. 위에 먼저 올린 사진은 3배율 버로우 렌즈를 끼우고 찍은건데, 아래 이미지는 버로우 없이 찍은 것이다.


IK

Saturday, May 27, 2006

실체를 규정하는 것

'나'라는 실체를 규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누군가 나를 보고 '예전과는 다르다'라고 말할 떄는 무엇이 다르다고 하는걸까?

흔히 사람을 기억할 때는 그 사람의 외모와 성격을 동시에 기억한다. 그리고 그 두 요소로 그 사람의 특징으로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늙어가며, 그에 따른 외모의 변화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몇년만에 만난 사람을 보며 '너도 늙었구나'라고 말하며, 그것을 자연스럽게 여긴다. 오히려 늙지 않는 사람을 놀라워한다. 즉, 사람의 외모는 기대되어지는 변화방향을 가지고 있다.

과연, 비슷한 논리를 외모가 아닌, 내적 영역에도 적용해볼 수 있을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히 변화하는 생각의 변화가 있을까?

...

라고 1년전에 초안을 써놓고 나중에 다듬어야지~ 했는데 이미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난거 같아서 올린다.

IK

Thursday, May 25, 2006

OpenWeb

http://openweb.or.kr
http://korea.gnu.org/openweb/1/LinuxWorld.html

현재 (정부) 웹페이지 국제표준화를 위한 민원이 진행중이고, 경우에 따라 소송으로 갈 수도 있다.

나도 민원인의 하나로 참여하고 있고, 후에 소송이 진행되면 역시 소송인의 하나가 될 것이다. 나는 당장 맥이나 리눅스를 주로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개인적인 양심과 기술적 지식에 근간하여 이게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관심있게 생각해주길 바란다.

// '정권'이나 지배계층을 의미하는 국가 말고, 정말 이 지역에 사는 국민을 사랑한다면 이런게 정말 진정한 '애국'이라 생각하는 신념이 있다.

IK

Wednesday, May 24, 2006

J.S. Bach의 Fuga

J.S. Bach가 작곡한 Sonata and Partita (BWV1001-1006) 중 세 개의 Sonata는 모두 2번째 악장에 Fuga가 배치되어 있는데, 이 푸가들은 모두 음악적 깊이나 연주의 난해성이나 길이 모든 면에서 샤콘느에 필적하거나 오히려 더 우수한 면을 가지고 있지만 샤콘느의 워낙 자자한 명성에 밀려서 사람들의 관심을 그다지 많이 끌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나 또한 샤콘느에 관심을 쏟아버려 푸가의 매력을 느껴볼 시간이 적었던 것이 사실이다.

http://en.wikipedia.org/wiki/Fugue

푸가란 기본적으로 대위법으로 작곡된 악곡의 일종이며, 단음의 멜로디를 주제로 가진다. 그리고 제시된 주제 다음에 제시된 주제로부터 대위법으로 작곡된 다른 멜로디들이 조화를 이루며 나온다. 이것이 기본적인 원리이며, 동시에 연주되는 멜로디의 갯수를 따라 1성푸가, 2성푸가, ...n성푸가 등으로 나뉜다. 주제는 똑같이 멜로디 하나지만 예를 들어 그 멜로디를 뒤집은 것과 그대로인 것을 조화시켜 첫번째 변주가 나온다면 두 성부가 동시에 나오므로 2성푸가가 된다. 이러한 식의 분류는 바흐의 마지막 작품 푸가의 기법(BWV1080)을 보면 극명하게 알 수 있으며, BWV1079번 Musical Offering에서도 푸가의 이름을 '리체르카레'로 바꿀 뿐 비슷한 아날로지가 적용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샤콘느도 변주곡이고 푸가도 변주곡인데, 일단 푸가는 가장 엄격한 형태의 변주곡으로 볼 수 있으며, 샤콘느는 일종의 춤곡으로 3/4박자 푸가를 상상하기 어려운 반면, 샤콘느는 대개 3/4박자로 되어 있고, 샤콘느의 경우는 도입주제가 1성이어야 한다거나, 대위법으로 변주가 이루어져야한다거나 하는 제한조건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요햔 파헬벨의 캐논, 브람스의 교향곡 4번 4악장도 샤콘느의 일종으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나도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하여간 푸가의 경우 성부가 나뉘어져 있기 때문에 오르간음악으로 많이 되어 있고, 부조니에 의해 피아노로도 많이 편곡이 되었따. 오르간 음악이 아는 경우 플룻 바이올린 쳄발로 등이 합주로 연주하는 푸가도 있지만 무엇보다 바이올린 솔로로 푸가를 연주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이다.

성부가 두개 있다는 것은 일상적인 화음을 목적으로 한 double stopping이나 triple stopping과는 다른 연주상 난해성이 있는데 이는 두 성부가 동시에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모차르트 협주곡에 등장하는 triple stopping의 경우 D 개방현과 1번 손가락을 올린 A현, 2번 손가락을 올린 E현을 (거의) 동시에 켜는 것으로 연주가 된다. 그리고는 다시 활은 E현으로 돌아가서 계속 하나의 멜로디만을 연주한다.

하지만 푸가의 경우에서는 약간 다르다. 푸가의 경우는, 두개의 성부가 동시에 진행해야 하므로 여러개의 double or triple stopping이 연속으로 나오고, 이 각각의 화음들이 별개의 화음이 아니라, 화음의 위쪽음은 위쪽음끼리, 아래쪽음은 아래쪽음끼리 멜로디가 이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모차르트 등에서와 같이 멜로디에 해당하는 화음을 위해 다른 두 음이 약간 희생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고, 화음을 이루는 모든 음이 동등한 정도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두 성부 중에서 어느 한 순간에 더 멜로디 구실을 하는 멜로디가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연주자들이 이 '더 멜로디 구실을 하는' 멜로디를 그 순간에서의 멜로디로 간주하고 그 음이 끊어지는 것을 방지하려고 한다. 그러면 발생하는 현상이 일반적으로 GDAE순으로 활이 진행하면서 내는 화음이 반대로 진행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C4-A5-C5-E5 화음 다음에 D4 C4 B4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부분이 있는데 이런 경우 C4 D4 D4 B4가 멜로디를 담당하는 성부이기 때문에 화음을 연주할때 C4+A5후에 C5-E5를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E5-C5를 연주하고 A5를 건드리고 C4를 연주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정말 손가락이 '꼬인다'. -_-;;;

물론 저런 식의 연주상의 난점은 샤콘느에서도 자주 발생하는 것이긴 하지만, 푸가 악보를 들여다 봤을 때 난감한 부분은 샤콘느 못지 않게 많다. 샤콘느에서 등장하는 화음은 대개 잡기 쉬운 화음들이고 샤콘느를 샤콘느답게 하는 부분은 아르페지오라고 생각하는데, 푸가는 정말 두개의 성부를 동시에 얼마나 잘 따라가느냐가 연주가 잘 되었느냐에 대한 척도가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IK

Tuesday, May 23, 2006

황우석과 비트겐슈타인

황우석 사건을 계기로, 논리적 절차와 전제에 대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황우석과 MBC의 대결 양상으로 사건이 전개되던 시절의 이야기인데, 황우석이나 MBC에 대한 개별적 평가나 그들이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었냐는가와는 별개로, '언론이나 다른 과학적 일반인이 그들이 가진 권력을 이용하여 과학자의 연구 성과의 진위여부를 의심하는 것이 정당한가'라는 고민이었는데, 역시 과학자도 연구성과에 따라 권력화가 된 입장이기 때문에 권력 vs 권력으로 이것은 정치적인 싸움이 된다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리고 '연구성과의 진위여부'라는 것에 따라 이것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지금까지 전제와는 상관없이 논리적 과정만 중시하던 비트겐슈타인 류의 상대주의 철학적인 생각을 하고 있던 나한테는 상당히 충격적인 생각이었다. 하지만 바꾸어 생각하면, 그동안 지나치게 절대적 절차적 논리에 대해 믿음을 가져왔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쉽게 진보, 보수 혹은 절대주의, 상대주의 하지만 실제로 그러한 구분조차도 실재하지 않는다. 정치적 논쟁이야 원래 결론이 없고 결론이 난다 하더라도 실제로 민초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게임이라는 것이야 뻔한 이야기이지만, 철학적 이야기에서도 그러한 허무주의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이 두려운 것은 사실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전기 철학의 집합체적인 책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의 마지막 문장을 통해 언어의 명확성을 강조하며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고 했다. 이 말은 언어의 이중성을 방지하고 싶은 분석철학자의 발언이기도 했지만, '세계는 실재하는 것들이 아니라 사실의 총체'라고 했던 위대한 철학자의 결론이기도 했다. 비트겐슈타인이 첫번째 저작을 마치고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점차로 이상언어를 포기하고 일반언어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황우석과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연상되는 것 사이에는 논리적 연관성이 있을까?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해도 되는 것일까?

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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