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November 02, 2014

피츠버그의 맛집

이 글은 1년 전 APS DFD를 위해 피츠버그에 방문하던 때부터 생각하던 글이다.

피츠버그에 도착하면서 룸메이트였던 용진이가 공항에서 라이드를 해줬는데, 저녁 약속을 잡으면서 가보고 싶은 음식점이 있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그곳이 어딘지 궁금해했다. 피츠버그에 6+년간 살았는데 오랜만에 방문에서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 어디인지 궁금하다는 것이다. 그런 관심이 이해가 되어, 피츠버그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들에 대해 적어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음식점 관련 글인 만큼 시점에 따라 자주 바뀔 수 있어서 너무 늦은 포스팅이 옳은가 하는 생각도 든다만 그래도 한번 써보려고 한다. 주소는 굳이 찾아보기는 귀찮으니 길 이름 정도로만...

1. Kaya Restaurant
Smallman St
이곳은 명백히 피츠버그에서 가장 독창적인 요리를 하는 곳이다. MadMex, Soba, Casbah 등을 운영하는 Big burrito의 식당이며, 퓨전을 추구하지만 지나치게 괴랄하지 않고, 보수적인 입맛을 배반하지 않는다. Strip distric의 Penn Ave보다 한블럭 더 더 강 쪽으로 들어가므로 그다지 찾기 쉽다고는 할 수 없지만 피츠버그에 장기 거주한다면 한번쯤은 꼭 가보기를 추천하는 곳.
이번에 다시 가보니 예전보다는 다소 아이덴티티가 강해진 듯.

2. Schenley Park Cafe
Schenley Dr.
이곳은 Schenley park 입구 중 Phipps conservatory 쪽에 있는 작은 건물이다. Park office로 사용되기 때문에 흔이 이곳에서 음식을 판다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으나, 간단한 음식과 커피를 판다. 어떻게 보면 음식이 굉장히 맛있는 곳은 아니지만 Schenley park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기 때문에 이른 아침에 가볼만 하다. 맛보다는 경치로 가는 곳이긴 하지만 Quiche는 먹을 만 하다. 이번에 가보니 서버가 남자로 바뀐게 에러...

3. La Feria
Walnut St.
Pamela 위에 있는 곳으로 페루 음식을 판다고 주장하는 곳이다. 하지만 내가 만난 페루인 중 누구도 그곳을 페루 음식점이라고 생각하진 않는 듯 했다. 그냥 밥집이라고 생각하면 편하고, 매일 그날의 special이 있는데 11불에 먹을 수 있다. 요리를 고르면 보통 샐러드와 밥과 함께 나온다. Special 메뉴가 항상 믿을 만 하기 때문에 메뉴를 고르지 않아도 되는 장점이 있으며, 그래서인지 내가 즐겨 갔었다. 이번에 가보니 여전히 맛있었다.

4. Red Oak Cafe
Forbes Ave.
핏대 스타벅스 옆으로 있는 집인데 La Feria 비슷하게 매일 매일 그 날의 메뉴가 있다. 역시 믿을만한 집. 하지만 이번에 가보지 못해서 아쉬웠다.

5. Salonika's
Sixth St.
그리스식 gyro를 파는 곳이다. 저렴한 가격에 사워 크림도 듬뿍 넣어준다. 인근에 있는 하인즈 홀을 갈 때마다 갔던 곳인데 이번엔 호텔이 바로 옆임에도 불구하고 못갔다. 일요일날 문을 닫을 줄이야...

6. Uncle Sam's Submarines
Multiple locations
피츠버그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듯.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7. The Point Brugge Cafe
Reynolds Ave.
벨기에 음식점. 맛으로만 따지면 피츠버그 베스트 3에 들어갈 거 같은데 가격이 다소 비싸다. 아마 피츠버그에 조금 있었다는 사람들은 한두번 다 가본 적이 있을 듯.

8. Piccolo Forno
Bulter St.
아마도 피츠버그에서 유일한 정통 이탈리안 음식점일 듯. 역시 가격이 꽤 비싸다. 피츠버그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대부분 미국식 이탈리안인데(심지어 italian town에도 정통 레스토랑이 없다), 이곳은 가장 덜 americanized된 곳으로 생각되고, 맛도 괜찮다. 다만 제 시간에 앉으려면 예약이 필수다.

9. Tram's Kitchen
Main St.
제대로 된 pho를 파는 곳이다. 미국 어느곳을 가도 이곳 만큼 깊이있는 맛을 내는 육수에 포를 파는 곳은 못봤다. 베트남 친구도 좋아했고, 특히 스프링롤도 좋다..

10. Sun Penang
Forbes Ave
동남아를 표방한 다소 퓨전 스타일의 레스토랑인데 추천할 만 하다.

IK

PS. 지금 내가 피츠버그 공항에서 막 내린다면, 일단 라 페리아를 가겠다. 이곳은 나한테 모든 요소를 제외하고 피츠버그의 1순위 집인데. 혼자서 가장 외롭고 힘들던 시절의 기억이 그대로 서려있는 곳이다. 피츠버그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먹은 음식점이기도 하며, 마지막으로 나올 때 팁을 50불인가를 주고 나왔었다.

Sunday, October 26, 2014

My academic genealogy

I recently got a chance to look up my academic heritage, or in other name, "academic genealogy". Here's my findings.

Dr. Ildoo Kim got his Ph.D. in 2011 at the University of Pittsburgh, under a supervision of
Dr. Xiao-Lun Wu, who got his Ph.D. in 1988 at Cornell University, under a supervision of
Dr. Carl P. Franck, who got his PhD in 1978 at Princeton, under a supervision of
Dr. Steve E. Schnatterly, who got his PhD in 1965 at UIUC, under a supervision of
Dr. Charles P. Slichter, who got his PhD in 1949 at Harvard, under a supervision of
Dr. Edward Purcell, who got his PhD at Harvard and a Nobel laureate, under a supervision of
Dr. Kennith Bainbridge, who got his PhD at Princeton, under a supervision of
Dr. Henry D. Smyth, who got his PhD in 1921 at Princeton, under a supervision of
~(Dr. Smyth has the 2nd phd, received in 1923 at Cambridge, under a supervision of Dr. Ernest Rutherford, who is a Nobel laureate.)
Dr. Karl T. Compton, who got his PhD in 1912 at Princeton, under a supervision of
Dr. Owen W. Richardson, who got his PhD at Cambridge, UK, under a supervision of
Dr. J. J. Thomson, who got his PhD at Cambridge, under a supervision of
Dr. John William Strutt or Lord Rayliegh, who got his PhD at Cambridge, under a supervision of
Dr. E. J. Routh, Cambridge, under a supervision of
Dr. William Hopkins, Cambridge, under
Adam Sedgwick, Cambridge, under
Thomas Jones, Cambridge, under
Thomas Postlethwaite, Cambridge, MA 1756, under
Stephen Whisson, Cambridge, MA 1742, under
Walter Taylor, Cambridge, MA 1723, under
Robert Smith, Cambridge, MA 1715, under
Roger Cotes, Cambridge, MA 1706, under
Issac Newton, Cambridge, MA 1668, under (yes, that Issac Newton)
Isaac Barrow, Cambridge, MA 1652, under
Vinceno Viviani, educated in 1642 at Universita di Pisa, under
Galileo Galilei, educated in 1585 at Pisa under
Ostilio Ricci, at Universita di Brescia under
Nicolo Fontana Tartaglia

MA(Barrow to Postlethwaite) does not mean Massachusetts. It means the Masters degree, which once was the most advanced academic degree. Surely, the degree does not mean much here.

IK

PS. I finished this article on 12/28/2011, but it took almost three years to complete linking external links. I am 24th student of Galileo Galilei, who died exactly 340 years ago my birthday.

Sunday, February 23, 2014

3년 묵은 이야기

2010년 말, 나는 지쳐있었다.


박사공부를 하는 누구나 그렇겠지만, 아니면 내가 유난히 그랬을지도 모르겠는데 졸업 즈음에 나는 정신적으로 매우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광학, 고체를 거쳐 유체를 공부하고 있었고, 이는 내가 물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예상했던 혹은 원했던 계획에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2002년에 대학원을 시작했고, 고체분광학에서 2년, 산화물반도체에서 2년을 지내고 2007년에 본격적으로 유체물리를 시작했다. 석사과정 지도교수님이셨던 김재훈교수님의 통계열역학 강의에 흥미를 느껴 그분의 석사과정 제자가 되었고, 피츠버그에 와서는 양자컴퓨터를 한다고 꽤 유명한 J. Levy의 학생이 되었으나, 여러 사정(주로 펀딩)으로 인하여 과에서 학생 부려먹기로 유명했던 Dr. Wu의 제자가 되었다.

Dr. Wu는 내가 처음 연구실에 출근하던 날 이런 얘기를 했다. "나는 학생이 교수보다는 열심히 공부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당연한 이야기라고, 당연히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그렇게 힘든 일인지 몰랐다. 어쩌면 이게 힘들다는 것은 2002년 대학원 생활을 시작하면서 알았어야 했는데, 내가 늦게 알았다. 지도교수였던 XL Wu는 매일 아침 10시에 연구실에 불을 켜고 대충 라면 뽀글이나 세미나 피자, 혹은 빵한조각으로 점심을 때우고, 새벽 1시에 퇴근하는 생활을 1년에 350일 정도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진정으로 물리를 즐겼다. 현상에 흥미를 느끼고,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하는 일을 좋아했다. 지난 11월에 갔을 때 나이 50이 넘어서도 직접 pipet을 잡고 직접 컬쳐를 하고 있었다. Biophysics에 대한 그의 열정이다.

그가 좋았던 점은, 학생한테 높은 기준을 적용하는 만큼, 학생을 배려한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는 항상 학생때 열심히 공부하고 어서 졸업하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정 나를 위해, 다소 거친 언어로, 조언을 해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University of Pittsburgh의 물리학과에는 규칙이 있다. 매년 커미티 미팅을 해야하며, 각 미팅이 1년 이상 떨어질 수가 없다. 2009년 8월에 중간미팅을 했던 나는 2010년 9월이 되자 더 이상 다음 미팅을 미룰 수가 없었다. 군대로 인한 나의 미국 체류 시효는 2010년 12월로 끝나기 때문에 나는 당시 학기 내로는 무조건 디펜스를 해야 했었고, 2010년 9월이 디펜스를 하는 미팅이 되길 바랬다. 하지만 그 때 미팅의 결과는 참담했다. 커미티를 구성하는 교수님들은 나의 학위취득을 반대하고 있었고, 특히 두 명 정도는 심하게 반대를 했다.

나의 co-advisor 격이던 Dr. WI Goldburg교수님은 그 즈음에 나한테 조언을 해줬다. 커미티는 만장일치제가 아니다. 아마 한 명의 반대의견은 무시될 것이다. 하지만 두 명의 반대는 극복되기 힘들 것이다. 남은 3개월간 나는 최소한 한 명으로부터 내 연구의 건실성을 인정받아야했다.

추가적으로 할 일이 생겼고, 밤을 새고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연구실에서 밤을 새고 학교 앞의 베이글집에서 치킨브레스트 샐러드를 먹거나 BLT 샌드위치를 먹는 일이 일상적이 되었다. 아마 내 삶에서 가장 힘든 시기가 이때가 아니었나 싶다.

다행히 연구적인 면에서는 실마리는 다소 풀려갔지만 여전히 졸업하고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우연히 아버지께서 조선일보에 실린 국방과학연구소 직원모집 공고를 보고 이야기를 해주셨다. 가장 정신없던 시기에 가장 성의없이 일단 지원서를 냈다. 면접도 정신없이 했고, 다행히 오퍼가 왔다. 비슷한 시기에 서울대학교 기계공학과의 최해천 교수의 연구실과 삼성 종합기술원에도 이야기가 오갔으나 결정적으로 전문연구요원 T/O가 없어서 내가 가기는 어려운 자리였다.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끊이지는 않고 있었는데 일단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오퍼가 오고 나서 모두 흐지부지 되었다.

만약 국과연에서 오퍼가 오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 정부 시책에 따라 전문연구요원 오퍼는 거의 씨가 마르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국과연 오퍼가 없었다면 다소 힘들었을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대부분 물리학과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는, 나에게는 말 그대로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 연구소에 가기로 결정한 것은, 무엇보다 내가 학교 생활에 너무 지쳐있었기 때문이었고, 당시로서는 더이상 학교에서 연구하는 것이 즐겁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어떠한 보람도 찾을 수 없었다.

국과연 오퍼를 받고, 논문 최종본도 모든 커미티에 송부를 하고 나서 디펜스 날짜를 기다리다가 기회가 되어 DFD를 갈 수 있었다. DFD는 APS, 즉 미국 물리학회의 유체물리 분과에서 주최하는 학회를 말하는 것인데, 매년 11월 추수감사절 직전에 개최된다. 미국 물리학계에서는 주로 3월 총회에서 유체를 많이 다루곤 했었는데 2000년대 들어서 점차 11월에 있는 분과회의로 그 중심이 옮겨가는 추세였다. 나도 2010년까지는 3월 총회만 몇차례 가다가 2010년 11월에 한번 DFD를 가보자는 생각이 들어 갔었다. 그때 어느 한국 학생의 발표에 들어갔는데, 발표의 퀄리티에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 영어 실력이나 프리젠테이션의 정도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해당 학생은 자신이 공부하는 토픽에 대해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국 학생들 몇몇에 대한 인상이 대개 그러하였는데, 아무래도 한국 학생의 이해력의 문제라기보다는 전투적이지 않은 대학원 환경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닌 적이 있긴 하기 때문에 한국의 분위기를 대략 알고 있는데, 확실히 미국처럼 지도교수와 공격적인 토론을 통해 자신의 퀄리티를 연마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고, 또한 미국 학교보다는 훨씬 더 실적에 대한 압박감 없이 설렁설렁한 분위기에서 연구를 하는 경우가 많다.

하여간 11월 DFD의 경험은 학교에서 일하는 것에 대한 내 생각을 바꿔놨다. 11월까지는 절대로 학교를 떠나야만 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때 문득 내가 학교에서 후배들을 위해 공헌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Dr. Wu와 Dr. Goldburg에게서 배운 방식으로 학생들을 잘 가르쳐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쨌건 국과연에서 일을 시작하기로 했고, 해보지 못한 경험, 즉 산업계나 국가 출연연구기관에서 일어나는 개발업무를 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연구를 하다보면 자신이 사용하는 장비를 직접 만드는 일이 있는데, 때로는 현상에 대해 연구를 하여 논문을 쓰는 것보다 현상을 관찰하기 위한 기술적인 일을 할 때가 재밌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연구에 1시간을 투자할 때 1시간의 결과는 보장되지 않지만, 기술적인 일은 대개 1시간의 결과가 있는 경우가 많아서 심적으로 편안한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회로를 만든다거나 프로그래밍을 한다거나 하는 것을 나 개인적으로도 잘 하는 편이고 또 즐기기 때문에 개발에도 소질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결국 2011년 6월에 국과연에 들어왔고, 나는 내가 biomimics 정도의 vortex control을 통한 maneuvering이라던가 그런 일을 할 줄 알았다. 쉽게 말해 곤충처럼 날 수 있는 무언가라던가. 하지만 예상 외로 나는 rigid한 금속으로 이루어진 엔진에서 일어나는 연소현상과 연료분사에 대한 업무를 하게 되었다. 알고보면 내가 했었던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이긴 했다. 다시 말해 나름 전공은 살리는 일이었다. 대학원 시절 UPMC(Univ. of Pitt. Medical Center)의 Cancer Institute와 함께 flow cytometry에 대한 공동연구를 한 적 있다. 이 과정에서 atomization과 vaporization, 그리고 그에 따른 visuallization은 약간의 경험이 있는 편이었고, 그러한 측면에서 국과연에서 내게 주어진 일들은 너무나 흥미로운 연구가 될 수 있는 포텐셜이 있는 문제들이었다.

하지만 가장 큰 setback은 시간이었다. 나라에서 요구하는 스펙은 높은데, 연구소에서는 그런 스펙을 거절하지는 못하고, 결국 저렴한 값에 높은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연구원들이 열심히 일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연구소라 불릴만한 일보다는 시급한 업무를 해결하는데 시간이 더 쓰이기 마련이다. 쉽게 말해 국방과학연구소의 '연구소'라는 명칭은, 예를 들어 로스알라모스 국립연구소의 '연구소'보다는 삼성전자'연구소'에 더 가까운 의미를 지니고 있다. 명확하고 시급한 미션이 있는 연구소의 연구활동은 시간적인 제약이 있기 마련이다. 예전에 Dr. Wu가 세상에 흥미로운 문제는 많지만 모든 문제가 다 가치가 있진 않다고 했었다. 하지만 흥미로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여유가 없었던 게 나에게는 힘든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요약하자면 국과연에서의 3년은 아주 도움되는 시간이었다. 내가 모르던 세상을 알았고, 특히 엔지니어링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여러가지 요소들 간의 트레이드 오프, 그리고 양산시에는 말단 단순노동자까지 고려하는 설계의 마진. 국과연, 특히 내가 속해있던 4본부 추진센터 2실은 좋은 곳이었다. 좋은 보스들을 만났고, 특히 팀 업무와는 상관없이 개인적으로 존경할 만한 분들도 있었다. 같이 일하는 coworker들도 모두 좋은 분들이었기 때문에 연구소를 떠나는 것은 큰 결정이었다. 단 하나, 내가 공학에 꿈이 있어서, 내 손으로 만든 엔진이 실제 비행기를 날게 한다거나 하는 꿈이 있다면, 이곳은 내 평생의 직장이 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좋은 사람들과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컸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공학, 특히 항공공학에 대해 큰 감흥을 가지지 못한다는 게 문제다. 내가 만든 엔진이 날아가는 장면을 생각해봤는데, 짜릴할 거 같긴 하지만 거기에 내 의미를 찾기 어려웠다. 나는 더 fundamental한 문제를 풀고 싶었다. 유체물리에서도 아직 풀리지 않은 난제가 많이 있다. 난류, 특히 선형적으로 안정된 pipe flow라던가, atomization의 문제라던가, 지금 내가 집중하고 있는 vortex dynamics라던가. 그런 문제에 더 집중하고 싶었고, 특히 학교에서 내 후배들에게 더 줄 수 있는게 있을 거 같았다. 그래서 나는 학교로 돌아가 학교에서의 커리어를 추구하기로 했다.

잘 안다. 요새 job market이 녹녹치 않다는 것 안다. 아마 한국에서 유체물리 전공으로 물리학과 교수가 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기계공학과로 간다면 내가 추구하는 기초적인 문제에 집중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내가 가려고 하는 포지션에서 몇 년을 지내다가 잘 안되서 결국 국과연이나 항우연 등에 입사하여 축하를 받는 사람들도 많이 봤다.

하지만 나는 아직은 좀 더 도전하고 싶어서, 이른바 2보 전진을 위해서, 1보 후퇴하기로 했다. 정년이 보장된 선임연구원 자리 버리고, 비정규직으로 가기로 했다. 이는 순전히 내 의지에 의한 것이며, 고등학교 1학년 때 가졌던 물리학도의 꿈이 조금 남은 것을 불살라볼 참이다. 다음주, 3월 3일부터 서울대학교 기계공학과에 연구교수로 합류하기로 했고, 최대한 좋은 논문을 많이 써서 학계에 임팩트 있는 사람이 되어보려고 한다.

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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