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Janine Jansen공연을 한번 보고 별로 좋은 평을 하지는 않았던 거 같은데, 이 동영상은 정말, 멋지다.
같이 연주하는 Julian Rachlin은 이 동영상에서 Janine과 연인사이인데, (위키 링크를 보면 Janine이 'former girlfriend'라고 나온다. 아마 깨진 듯. 아싸.) 이 동영상을 보면 정말, 활 쓰는 거나, 핑거링의 방식이 둘이 거의 커플룩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통일된 모습을 보여준다. 게다가 중간에 서로 눈빛교환하는 걸 보면 정말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대화'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연주도 훌륭하고, 두 연주자도 너무나도 확신에 차있고 행복해보이는, 정말 좋은 연주다. 나도 죽기전에 저런 연주를 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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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는 김지연님의 연주이다. 사라사테의 Introduction and Tarantella. 이분은 살짝 낭만음악 스페셜리스트로 이미지가 고정된 거 같기도 한데 확실히 낭만음악에 있어서 이만한 연주 듣기 힘들다. 이거도 그중에 하나고. 저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은 적당한 길이의 스피카토/테누토가 인상적이다. 사실 대중무대라서 쉽게 쉽게 연주하면서 약간 부정확하게 연주되는 부분도 없진 않지만, 충분히 독특한 분위기를 잘 유지한 연주 같다. 아니, 오히려 저 '쉽게 쉽게' 가는 모습이 저 곡과 꽤나 잘 어울리는 분위기가 아닌가 한다. 완벽한 연주라거나 제일 잘한 연주라고 하기보다는, 음악이라는게 모든게 다 맞아떨어져야 좋은 연주가 되는 것만은 아니니까. 그리고 표정이 참 행복해 보여서 좋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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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Paganini의 Caprice 24번. 아무래도 바이올린 하는 사람중에서 테크닉의 상징인 곡일 것이다. 앞선 연주는 20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라 불리는 야사 하이페츠의 연주, 두번째는 알렉산더 마코브의 연주.
Markov는 Markovian Process로 유명한 과학자 Paganini Specialist라는데, 연주가 모범적으로 아주 훌륭한 연주라기보다, 정말 자유로운 분위기가 넘친다. 파가니니라면 저런 자유로움이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 아마 연주 자체는 하이페츠가 모든 정확성 면에서 훌륭할 거 같지만(실제로 마코브는 특히 완전8도 화음에서 상당히 불안한 면이 좀 있다), 그리고 파가니니가 20세기에 환생했어도 하이페츠보다 테크닉에서 못했을 거 같지만, 하이페츠의 '이건 껌이야'하는 듯한 무표정함에 비해서, 괴상한 머리를 하고 스스로 파가니니의 환생인 듯 세일즈를 하려고 마음먹고 나온 마코브의 연주가 은근히 더 끌리는 면이 있다. 게다가 악보에 지시되지 않은 반복도 하는 하이페츠와 달리(이거 이해 안가는 포인트) 반복을 해도 매 프레이즈가 비슷하게 연주되지도 않는다! 특히 왼손 피치카토는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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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오늘 컨셉은 듣고 있으면 무언가 끌리는 연주들이다. 사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유투브 동영상들, 같이 보라고 그냥 링크해본거다.
IK
P.S. 그리고 이건 덤. 이 사람들도 참 기발하고 재미있다.
ㅎㅎㅎ
Thursday, January 31, 2008
시시껄렁한 음악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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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January 31,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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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January 27, 2008
이명박의 교육제도 유감
사실 내가 상당히 反한나라당의 정치성향을 가졌다 하지만 그 이유는 대부분 그 특정 정당의 역사적 태생 배경과 관련된 보이콧이기 때문에 실제로 개개의 정책을 들여다봤을 때 한나라당과 일치하는 부분도 종종 있기도 했다. 하지만 이명박 이거 하는거 보니까 내가 봤을 때 완전히 막장이다. 이전에 운하파는거하고 의료보험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했지만 이거, 교육제도에 대해서도 한마디 해야할 거 같다.
1. 내 생각에 한국 교육제도의 근본적인 원인은 '문제가 없다'라는 것이다. 문제가 아예 없다고 하면 좀 이상하고, 교육제도를 고침으로 해서 해결 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결론적으로, 한국의 교육문제는 경제와 사회정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으며 모든 것이 연계되어 장기적인 로드맵에 의해 해결되어야 한다.
한국의 교육 문제는 주로 학벌주의에서 기인한다. 한국의 대학은 서열화되어 있고, 이 서열이 마치 객관적인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많은 고등학생들은 이 서열화된 대학 중 위에 있는 학교를 가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노력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폄하될 수 없으며 자식을 위하는 학부모의 열정도 무시될 수 없다. 학벌주의 자체로서는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없다. 현실적으로 학벌주의가 없는 유럽보다 학벌주의가 존재하는 영미권 국가의 대학 경쟁력이 좋다. 물론 이는 학벌주의 때문인지 미국의 막강한 경제력 때문인지는 사실 알 수 없다. 미국과 비슷한 경제력을 가진 EU전체로 보면 미국보다 유럽이 좋은 대학이 부족한 것 역시 사실이다.
한국식 학벌주의의 문제점은 그 정점에 서울대라는 단 하나의 대학이 있다는 것이고, 다른 모든 대학이 일렬로 정력이 되어 있어서 자로 줄세우기 적합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노무현 정권의 수능 등급제를 아주 찬성하는데, 어떠한 형식의 고등학생에 대한 시험도 그 학생의 잠재력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할 수 없다. 수능이라는 단어 자체가 잠재력에 대한 평가를 내포하고 있는 만큼 난 여기서 그 부정확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고등학교때 공부 잘 했다. 수능 시험 보면 상위 1%정도에 들었지만 당시 1%에 못든 다른 친구들이 나보다 낮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그 이후 지금까지의 삶에서 잘 느끼고 있다.
하여간. 대학이 너무 많은 게 문제라면 문제고, 그러한 상황을 논의에서 제외할 때, 일렬로 줄세우는 것이 학생을 뽑는 가장 우둔하지만 가장 논란의 여지가 없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학생과 대학들이 모두 그러한 일렬로 세우는 방법을 선호하는 것이고 여기서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 고로 한국의 교육/입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렬로 세우면 안된다.
공정한 일렬로 세우지 않기 - 즉 미국 대학식 다면평가 - 를 한국의 고등교육기관이 입시의 방법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인프라가 필요하다. 1년 내내 입시만 전담관리할 상임직원이 필요하며, 입시철에 직접 원서를 읽어보고 평가를 할 교수들의 커미티가 필요하며, 교수들의 업무를 분담해줄 비서가 필요하다. 미국식 다면평가는 공짜로 되는게 아니다. 결국 필요한건 돈이다. 대학에 펀드가 더 많이 들어와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교육기관에 대한 기부에 대해 면세범위가 확대되어야 하고, 교육기관에 대한 전기세 감면 등의 제도적 확충이 선행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사회 전반적인 경제상황이 좋아져야 하고 조세정의가 바로서야 한다.
(학벌주의 자체도 학벌이 좋지 못하면 잘 살지 못하는 경제적 상황에 기인하기 때문에 이 역시 경제상황이 해결되면 많이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는 종국에는 국가가 대학에 간섭하지 않는 시스템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의 대학의 현실에서는 반대한다. 간섭받지 않는 대학이 선택할 수 있는 옵션에 '공정한 다면평가'는 없다. 지금의 현실로서 '공정'하기 위해서는 일렬로 세울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수능의 점수까지 공개한다는 것은 오히려 더 확률적인 것이다. 나는 고등학생이 문제 하나 더 맞고 틀리는 것이 그들의 '능력'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를 맞고 틀리는 과정은 stochastic process라는 생각이다. 수능 등급제에 대한 반대는 최소눈금이 1mm인 자를 이용하여 길이를 재면서 눈대중으로 1.2mm와 1.3mm를 구분하려 하는 것과 같이, 내 눈에는 넌센스로 보인다.
2. 영어를 가르치지 마라.
사실 앞서서는 교육문제보다 입시문제에 대한 단상이었는데, 좀 더 교육에 가까운 문제로 가서, 난 영어를 가르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의 영어교육 수준이라면 충분하다고 생각되고, 다만 한문은 좀 더 가르치는 것이 옳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다. 비슷하게 수학과 과학를 덜 가르칠 필요가 있고, 반면 독서나 체육 등의 시간은 더 가져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다. 더불어 불필요한 평가도 줄일 필요가 있다.
나는 중고등학교때 공부를 잘 해서 좋은 대학에 가서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하고 지금 영어를 매일 쓰면서 일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이 왜 '공부를 덜 시켜야 하고', '물리, 수학의 수준을 낮춰야 하고', '영어교육이 무의미한지' 이야기하는 것에는 설득력이 있을거라고 스스로 믿는다.
먼저 대학과 고등학교의 분업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대학에서 커버해야할 범위가 있고, 고등학교에서 커버해줘야 할 범위가 있다. 확실히 '미적분학'은 대학에서 커버해야할 범위라고 생각한다. 그에 대한 자연스러운 추론으로, '양자역학' 따위는 고등학교에서 다룰 껀덕지가 아니다. 선택과목으로 남겨둘 필요도 없다. 필요한 (우수한) 학생은 대학에서 계절학기를 듣고 학점을 인정받게 할 수 있게 하면 된다.
미적분학이 대학에서 커버되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무한소'의 개념이 없는 상태에서 배우는 미분은 그저 x^n을 nx^(n-1)로 치환하는 단순 연산과 다름이 없다. 무한소의 개념은 사실 대학교 1학년 생도 잘 이해하지 않고 넘어가는 개념이다. 정확한 베이스가 없는 상태에서 섵부른 선행학습은 오히려 이후 학습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측면이다. 'epsilon-delta method'를 고등학교때 가르치고 calculus를 마저 가르치던가, 아니면 둘다 대학으로 미뤄라. 사실 뉴턴 이후의 모든 현대 과학은 이 epsilon delta에서 시작한다. calculus를 고등학교때 배우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16살 짜리한테 아무리 epsilon과 delta에 대해 이야기해도 못알아먹는다에 한표 던진다.
못알아먹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생에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비슷한 논리로 영어로 그렇게 애써서 가르칠 이유가 없다. 한국인이 영어를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문법에 치중하는 교육에 대한 성토도 있고, 영어와 어순이 다르다느니 그런 이야기도 많지만 무엇보다 큰 이유는 인생에 영어가 별 도움이 안되기 때문이다. 난 82년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면서 지금까지 한국에서 외국인이 나한테 먼저 영어로 말 건 적 한번도 없다. 어설픈 한국어로 길 물어본 외국인은 몇 있었다.
필요는 배움의 어머니이다. 내 어머니는 몇년 전부터 인터넷을 배우고 싶어하셨지만 최근까지 못배우고 계셨다. 당장 필요가 없으니까. 아직 세상은 인터넷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니까. 최근에 어울리는 분들이 싸이월드에 클럽을 만든 모양이다. 이제 곧잘 쓰시게 되었다. 외국인이라고는 눈씻고 찾아봐도 없는 한국에서 영어를 배워서 어따 쓰겠다는 건지 대체 이해가 안된다. (다른 얘기지만 요즘 보이는 외국인들도 한국에 올때 누구나 영어를 하겠지 하고 기대하고 오진 않는게 정상이다.) 누구나 어느정도 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몇몇의 bilingual들을 양성하여 전문적인 통역을 하게 하는 것이 한국적 현실에 훨씬 적당하다. 다시 말하자면 그렇게 영어를 배워제껴도 영어 제대로 하는 한국인이 별로 없다는 사실 자체가 한반도에서 영어가 별 쓸모 없는 껀덕지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세상에서 언어만큼 또 충분한 연습 없이 늘지 않는 것이 없는데 연습할 기회나 필요성 자체가 없으니 영어를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다시 수학, 과학으로 돌아가서, 과학 전공자로서의 삶 말고, 일반인으로 살면서 나는 어떤 유기물 안의 두 탄소가 파이 결합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할 이유를 전혀 찾지 못했다. 게다가 이런 내용은 물리학과 대학원 양자역학에서도 안배우는 내용이다. 아마 화학과 쪽에서 배우겠지만 화학과에서 양자역학을 제대로 배운 사람을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명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난 그런 내용은 교과서에서 그 부분을 쓴 사람 말고 세상에 아무도 제대로 알고 있지 않은 문제라고 생각한다. 특히 물리 교과서를 지금 읽어보면 심지어 이 사람도 제대로 알고 쓰긴 한건지 하는 생각이 드는 부분도 있다.
그러면 나중에 경제나 물리, 화학 등은 전공하려 하는 학생은 어찌 해야하냐고 누군가 물을 수 있다. 이 사람들 교육시키는게 바로 '대학'이 할 일이다. 부디 한국의 대학들은 '준비된 학생'을 뽑으려 하지 말고 '가능성 있는 학생'을 뽑아서 '잘 준비시켰으면' 한다.
그럼 고등학교때 뭘 가르쳐야 하나? 고등학교때는 그저 책이나 열심히 읽히면 된다. 사실 책이나 읽히라고 하면 좀 이상한 말이 되고, 과학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수식 없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로 과학적 개념을 소화시키고 실행활과의 연관성을 찾아 학생에게 동기유발을 시켜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복잡한 포뮬레이션 없이 얼마나 물리적 개념을 잘 가르칠 수 있느냐는 Paul Hewitt의 'Conceptual Physics'등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고등학생용으로 만들기에는 좀 많이 손질이 필요하지만 Feynman's Lecture series도 물리적 개념이 얼마나 말로 잘 설명되어질 수 있는 좋은 예이다. 물론 수식 없이 말로 가르치면 교사들이 힘들어질 것이고, 최소한의 수식은 있어야 할 수도 있다.
또한 수학은 나중에 쓸모가 없더라고 논리력 확장에 도움이 된다...라는 반론이 있을 줄로 안다. 이는 전형적인 버틀런트 러셀 계열의 수리논리학자들의 방식일 뿐이다. 논리와 수학이 합쳐진 것은 20세기 초에 지나지 않으며, 수학적으로 표현될 수 없는 많은 논리적인 책들이 있다.
사실 나는 독서 반대론자다. 독서를 통해서 자신의 깊은 철학을 발견해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장기의 비판적 독서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중고등학교와 대학 저학년때 많은 책을 읽었다. 물론 모든 책들은 교과과정에서 권장되는 책이 아니었다.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책은 수식이 단 하나도 없는 책이지만, 내가 과학자로서 커리어를 쌓는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학을 교육하는 방법이 수식을 가르치는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다. 수식은 과학을 가르치는 가장 편리하지만 저급(low-level)한 방법이다. 앞서 말한 토마스 쿤의 책 이외에 차머스의 과학철학 책도 논리력을 키울 수 있는 교재로 적당하며, 물리분야에서는 특히 갈릴레이의 '두 개의 과학에 관한 대화'라는 책은 정말 위대한 책이다. 갈릴레이의 저서가 몇개 있는데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섰던 과학자인 만큼 모두 위대한 책이다. 약간의 중학교 수준의 기하학적 지식이 필요하지만 뉴턴의 Principia도 원문으로 읽을만 한 책이다.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같이 러셀과 다른 방식을 사용하는 철학자들의 저서도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널리 읽혀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시대에 따라 유행하는 책들, 나는 니글고폰테의 'Being digital'이나 앨빈 토플러의 책을 읽었었는데, 요즘같으면 Linked나 The bit and the pendulum이라던가, Freakonomics도 좋은 책이고, 등등 시중의 많은 책들도 조심스럽게 교육의 레퍼런스가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까지 이야기는 모두 일반적인 교육에 대한 이야기이다. 고등학교때 배운 바로는 이러한 초중고등 교육은 기본적으로 '사회화'과정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얽혀 살 수 있는지 가르치려면 다양한 범위의 역사와 철학적 탐구가 필요한 것이지 깊이 들어가는 학문의 영역이 필요한 게 아니다. 비유를 하자면, 모두 나중에 축구선수가 될 필요는 없지만 축구를 어울려 하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영재교육이거나 그런건 좀 다른 문제다. 사실 나는 스스로 양질의 '영재교육'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은사님 중 한분은 '영재교육'보다는 '영재화교육'이라는 말을 선호하시는 거 같은데 상당히 수긍이 가는 용어다. 하여간 그 영재라는 용어가 '학문'을 염두해두고 말하는 것이라면 나는 사실 학문은 '할 놈은 결국 한다'라고 말하고 싶다. 학문의 세계가 워낙 인생을 두고 이루어 가는 성취의 과정이기 때문에 결국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성실하느냐'라고 생각한다.
3. 영어 전용에 대해 한마디 더.
앞서 문단에 내가 러셀을 별로 안좋아하는 것처럼 썼지만 사실은 나는 버틀런트 러셀의 영향을 많이 받은 비트겐슈타인의 빠돌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저서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의 핵심은 언어와 사고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영어 전용이라는 것은 영어를 우리가 왜 공부해야 하고 그런 것을 떠나서 민족성에 대한 모욕이고 국가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한다. 언어는 인간의 사고를 지배한다. 영어를 공용어로 지정한다거나, 교육을 영어로 진행한다거나, KAIST처럼 학부 강의를 영어로 한다거나. 난 모두 절대반대다. 내가 나중에 대학에 교수가 되어 영어로 강의하기를 강요받는다면, 나는 영어강의를 개설할 수밖에 없겠지만, 별정 시간을 두어 한국어로 다시 한번 강의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 물리학회에서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한 적이 있다. 사실 이게 쉬운 과정이 아니다. 한국어에 대응되는 언어가 없어서 번역된 말이 더 어려운 경우가 부지기수다. 'degenerate star'를 '졸들은 별'이라고 해석한다면 이건 이미 내 뇌가 이미 degenerate되어버린다. 하지만 이는 언어와 사고가 어떻게 서로 영향을 미치며 발전해나가는 지에 대한 좋은 예다. curl이라는 용어가 있다. 벡터 연산자중의 하나로 그 벡터가 회전성을 설명해준다. 이에 대한 한국 물리학회의 번역이 '회오리'이다. 예컨대 'curl F'를 '벡터 F에 회오리를 걸면'으로 해석하는 식이다. 처음에는 좀 웃겼다. 하지만 보면 볼 수록 잘 한 해석이라는 느낌이다. 영미권 사람들이 curl이라는 용어를 처음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을 할까?
외국인 학자를 유치하기 위해 대학원 과정에서 영어 전용을 시행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한국도 brain drainage가 시작되었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동남아의 좋은 인재를 끌어모으는 수밖에 없으며 그를 위해서는 학계의 공용어인 영어를 쓰는 방법이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유럽의 좋은 대학원들이나 이스라엘에 있으면서도 세게적 입지를 굳히고 있는 Weizman Institute가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교육'과정에 있는 학부 학생들에게 영어로만 배우게 하는 것은 내가 봤을 때 학자로서의 직무유기다. 학자는 사회의 지원으로 학문을 하는 대신, 사회가 자연에 대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지름길을 제공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고와 언어는 함께 발전하는데, 자신들의 연구 편의성을 위해 일반인을 위한 번역 서비스를 중단하는 것은 한국어를 쓰는 7천만에 대한 역사적 직무유기라고 생각한다.
IK
P.S. 수학에서 trivial solution이라는게 있다. 예를 들면 dx/dt=x 라는 미분방정식을 만족하는 solution이 뭐가 있냐고 물을 수 있다. solution이라는게 방정식에 집어넣어서 등호가 성립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solution은 x=0이 있다. d(0)/dt=0이므로 0은 방정식의 해가 된다.
하지만 x=0이 진짜 해인가? 수학에서 이런걸 trivial solution이라고 한다. 이 글의 컨셉에 맞춰서 한글로 말하자면 '하찮은 해'라고 하면 좋을 거 같다. trivial solution은 방정식의 solutioin이긴 하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는 해를 말한다. 모든 종류의 homogeneous differential equation에서 x=0은 trivial solution이다. 저 방정식의 trivial하지 않은 '진짜 해'는 x=exp(t)이다.
세상에 많은 문제가 있고 개중에는 답이 있는 문제도 있고 없는 문제도 있고, 혹은 방정식이 하도 복잡해서 trivial solution 말고는 찾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게 찾기 어렵다고 해서 trivial solution x=0을 그냥 답이라고 적어놓으면 점수를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봤을 때 이명박 regime의 방식이 딱 이렇다. 사회적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가 왜 일어나는지 깊이 생각해보고 답을 찾거나, 혹은 최소한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모든 문제는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다보면 풀리는 것과 같다는 식으로 딱 그 상황에서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trivial solution을 건네준다. 이러한 경박함이 너무나 거북하다.
내가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을 지지했고, 아직까지 훌륭한 대통령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는 이유가, 언론보도와는 다르게 그의 깊이 생각하는 면모 때문이다. 2002년 대선을 6개월 이상 앞두고 KAIST에 와서 이공계 문제의 원인에 대해 과감히 '페이가 적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모습에 정말로 감동을 받았다. 그 이전에 이공계 문제에 대해 쉽게 이공계 종사자들의 명예와 책임감등의 감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정치인은 많이 봤어도 그게 생활과 연관된 '돈'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는 사람은 노무현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4개월쯤 후에 연세대 강연에서 학벌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구체적인 이야기를 옮길 순 없지만 정말 깊이 생각한 흔적이 묻어나오는 talk이었다고 회상한다.
조중동에서 노무현을 경박하다고 하는데, 사실 이명박은 입도 경박하고 생각하는 거도 너무나 경박하다. 깊이 뚫어보지 못하고 편의적으로만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이 사람들이 '실용주의'가 아니라 '편의주의'라고 하고 싶다. 하여간 이러한 마인드로는 경제도 살릴 수 없음이 분명하다. 난 다 알고 이명박 반대했다. 5년 후에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나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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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January 27,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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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January 26, 2008
시시껄렁한 일상얘기 - Ph. a.b. D
1월에 포스팅이 많이 뜸했다. 연유인즉, committee meeting이 있었다. 여기 시스템이 어찌 되냐 하면, doctoral committee가 3번 정도 만나게 되어 있고, 그중에 첫번째가 proposal을 겸하며, 마지막인 세번째가 디펜스를 겸한다. 어제 첫번째 proposal을 겸하는 미팅을 마침으로서 비로서 'all-but-defense'가 되었다. 헥헥. 여기까지 오는데 너무 시간이 오래 걸렸다. committee meeting은 원칙적으로 한학기에 한번 할 수 있고 각 미팅의 터울이 1년을 넘지 못하게 되어 있으므로 나는 규정상 8~24개월 안으로 디펜스를 하게 되어야 한다. 뭐 하지만 앞일이 어찌 될지는 아직 모른다. 사실 규정상으로 따지면 어제 했던 프로포절도 퀄을 통과한지 1년 안에 했어야 한다. 중간에 그룹을 바꾼 걸 고려하더라도 6개월이 늦은 셈이다.
물론 규정 따라 첫해에 퀄을 통과한 학생이 4년만에 박사를 받는 경우는 별로 없다. 학교/과마다 이거도 분위기가 다른 부분이긴 한데, 우리과는 형식상 규정보다는 학생이 얼마나 박사의 소양을 가졌나 하는 것이 디펜스 시기 결정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제때 졸업하기 위해서는 나도 좀 더 빠른 속도로 소양을 키워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지금까지 약간 'fruitless small projects'만을 하고 있는 느낌을 받긴 했는데 그래도 이번 미팅으로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 확실히 정해지니 그거 하나는 참 잘 된거 같다.
하여간. 시시껄렁하다기보다는 그래도 박사과정 내에서 나름 큰 이벤트 중에 하나이긴 하고, 끝나서 일단 한숨 돌리면서 몇마디 적어봤다.
그러고보니 올해가 '대학교'라는 아카데미아의 울타리에 들어온지 10년째 되는 해네. 앞으로 얼마나 이 울타리 안에서 살게 될까? 평생 살게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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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가 일이고 일이 공부인 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 가끔 공부 마치고 일하게 된다거나 혹은 일하다가 잠시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부류의 사람들-공학, 상경계열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다. 주변 환경을 바꿔보는 게 가능하다는 면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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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January 26,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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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January 22, 2008
Feynman Algorithm
리차드 파인만한테는 이른바 '파인만 알고리즘'이라고 불리는 아주 강력한 일반적인 문제 해결방법이 있었다고 한다. 이 알고리즘은 너무나 강력하여 모든 일반적인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는데: 파인만만 쓸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알고리즘이란:
1. Write down the problem.
2. Think VERY hard.
3. Write down the solution
---
파인만의 천재성에 대한 유머스러운 비유이긴 하지만 오늘 점심을 먹으면서 문득 이렇게 '깊이 생각하면' 답이 나올 수 있다고 알려진 파인만이 정말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 나보고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 '현명한 자'라고 대답할 것이고, '무엇이 현명한 것이냐'라고 되묻는다면 '깊이 생각하는 것'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나중에 사람들이 나를 'deep thinker'라고 기억해준다면 만족스럽지 않을까.
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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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January 22,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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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January 20, 2008
Peer Gynt와 Tannhauser
Edvard Greig의 유명한 곡 중에 Peer Gynt Suite No.1 and No.2 가 있는데 이 둘은 기악곡으로서 Henrik Ibsen이라는 노르웨이의 극작가가 만든 Peer Gynt라는 극에 피쳐링된 음악을 추린 것이다. 순수 기악곡이고 그 특유의 북구적인 분위기와 아침의 노래나 솔베이지의 노래 등에서 느낄 수 있는 평화로운 분위기로 인해 많이 연주되고 CD로도 많이 나와 있다. 반면 suite가 아닌, 원래의 오리지널 incidental music은 아무래도 suite보다는 구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렇게 구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최근 마음먹고 Borders CD section을 뒤져서 하나 건졌다.
CD를 소개할 건 아니고, 다만 유투브에 있는 노래를 하나 링크해놓으련다. 궁금한 사람은 노래를 들어보시라고... 소프라노이신 듯한 저 아주머니 얼굴이 좀 압박이지만...
스토리를 보면 Peer Gynt는 집안이 망하고 열라 망나니가 되서 고향을 떠나서 여기저기 방탕하고 타락한 짓을 하고 다닌다. 가끔 돈을 벌기도 하지만 원체 재수가 없으려니 손에 남는 건 아무것도 없고, 결국 늙고 지쳐서 고향에 돌아오게 되는데 그의 옛 연인 Solveig가 반갑게 맞아주어 그녀의 품 안에서 '사랑의 구원을 받고' 편안히 죽어간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맨 마지막에 나오는 장면, 솔베이지의 품 안에서 피어긴트가 죽어가는 장면에 나오는 음악이 저 앞에 링크한 솔베이지의 노래인 것이다.
가사를 펐는데 올려보자면,
Kanskje vil der gå både Vinter og Vår,
og neste Sommer med og det hele År,
men en gang vil du komme, det vet jeg vist,
og jeg skal nok vente, for det lovte jeg sidst.
Gud styrke dig, hvor du i Verden går,
Gud glæde dig, hvis du for hans Fodskammel står.
Her skal jeg vente til du kommer igjen;
og venter du hist oppe, vi træffes der, min Ven!
-_-;;; (이상하게 내 귀가 이상한건가 가사와 노래가 싱크가 잘 안된다...)
영어를 찾아봤다.
The winter may pass and the spring disappear
The spring disappear
The summer too will vanish and then the year
And then the year
But this I know for certain: you'll come back again
You'll come back again
And even as I promised you'll find me waiting then
You'll find me waiting then
Oh-oh-oh ....
God help you when wand'ring your way all alone
Your way all alone
God grant to you his strength as you'll kneel at his throne
As you'll kneel at his throne
If you are in heaven now waiting for me
In heaven for me
And we shall meet again love and never parted be
And never parted be!
Oh-oh-oh ....
머, 나름 아름답다.
러시아의 어떤 통계학자가 러시아에 존재하는 모든 이야기들을 분류한 결과 모든 이야기가 불과 몇개의 카테고리 안으로 들어갔다고 하는데, 이런 류의 스토리 -
남자는 원래 잘난 놈인데 어쩌다 타락하게 되어 여기저기 들쑤시고 이 여자 저 여자 찝적대고 다니다가 결국은 피곤해서 집으로 돌아오게 되고, 어떤 정신줄 놓은 여자가 그 남자를 여전히 사랑해서 그 남자는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무한한 평안을 느끼고 (종교적 혹은 종교적이지 않은 의미에서) 구원을 얻는다.
- 는 무척이나 흔한 거 같다. 아마 남자가 대부분이던 19세기 작곡 환경에서 모든 남자들의 로망이었으리라. -_-
내가 예전에 다른 곳에 썼던 탄호이저에 대한 감상과도 상당히 비슷하다. 탄호이저는 잘나가는 음유시인인데 육체의 탐닉의 신인 베네스가 사는 베네스버그에 들어간다. 베네스는 탄호이저를 몸으로 맘껏-_- 사랑해주지만... 탄호이저는 어느 날 갑자기 '아름다운 꾀꼬리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려서-_- 인간세상에 다시 나온다. 육체의 기쁨을 알게 된 탄호이저는 다시 잘 나가는 음유시인이 되지만 그의 노래에는 어딘가 모를 음탕한 기운이 있고, 어느날 그의 과거가 탄로나서 그는 로마로 가서 교황한테 용서를 구하는 처지에 몰리지만 교황조차 그를 구원하지 않는다. 고향으로 돌아와서 죽을 준비를 하는데 그를 예전부터 좋아하던 그 지방 영주의 딸 엘리자벳이 그를 대신해서 죽고 그녀의 목숨으로 인해 탄호이저는 구원받는다...라는 스토리다.
이건 뭐 마치 아무리 바람을 펴도 아르웬의 끄떡없는 사랑을 받으며 보호되는 아라곤을 보는 것과도 같고, 아무리 기억을 잃고 들쑤시고 다녀도 결국엔 브룬힐데의 사랑을 받게 되는 지크프리드의 스토리와도 비슷하며 아무리 잠수를 타서 춘향이를 고생시켜도 결국은 해피엔딩에 이르게 되는 이몽룡의 스토리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하여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스토리는 반복되는 거 같다.
이런 부류의 스토리의 가장 큰 특징은 항상 기다리는 것은 여자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문제를 만드는 쪽은 남자라는 거다. 아마 남자가 사회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여자는 순종하도록 억압되어진 시대상을 반영하는 모습이겠지만 남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그리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게다가 모든 스토리는 남자에 의해 쓰여진 것이 아닌가. Ibsen의 경우는 모르겠지만 그리그나 바그너나 톨킨이나 상당한 인종주의자였다는 특징이 비슷하기도 하다.
뭐 하여간 다시 스토리로 돌아오면, 역시 예전의 탄호이저에 대한 감상과 비슷하게도, 저런 식으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올 구석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운이 좋은 케이스일 수밖에 없다는 것과, 그 주인공들이 어쩌면 누울 자리 확인 하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을 수도 있었다는 거다. 이야기과 현실은 상당한 괴리가 있는데 아마도 이야기에서는 이러저러한 정황적 상황이 생략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사랑과 비사랑, 도덕과 비도덕같은 개념들이 이야기에서처럼 '삶과 죽음'과 교환될만큼 강렬한 대비구조를 가진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런 것을 떠나서 지금 나는 그런 식으로 내가 돌려줄 수 없을 많큼의 사랑을 상대방으로부터 받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저러한 큰 행운을 누린 사람을 부러워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전히 '사랑'이라는 실체가 무엇이냐는 어려운 질문에 대해서는 일단 형이상학적인 질문으로 피해가고 있지만 말이다.
IK
P.S. 머 요즘은 나를 생각해주는 여자도 없는 거 같긴 하지만, 뭐 그런걸 떠나서 나도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면서 문제 만드는 데는 저런 이야기 주인공들 만만치 않은거 같다. 저 사람들은 누울 자리라도 보고 누웠지...
P.P.S. 예전에 썼던 탄호이저 관련 글 덧붙인다. 사실 내가 쓴 글 중에 스스로 젤 맘에 드는 글이다.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를 보면, 바그너 자신도 탄호이저라기보다는
볼프람에 가까웠고, 또 그렇기를 원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난 볼프람보다는 탄호이저에게 더욱 인간적인 냄새를 느끼며,
동질감을 느끼며, 어쩌면 탄호이저처럼 살길 더 바랄지도 모른다.
볼프람은 바람직한 삶을 유지한 결과 애초부터 구원이 예정되어있었겠지만,
탄호이저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엘리자벳으로 인하여 탄호이저는
겨우, 가까스로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 어찌보면 탄호이저는 베네스부르크에
갔던 죄값으로 엘리자벳을 잃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볼프람에게는
에리자벳과 같은 사람이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사랑받지 못하면서 성스럽고 정신적인 사랑을 노래하기보다는,
방탕한 삶과 탐닉하는 삶을 살면서도 사랑을 받아 언젠가 구원되는,
그런 삶을 더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 깊은 자아에서는 말이다.
사실 베네스의 마력에서 빠져나올 수 있길 바라지도 않으며,
그렇게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냥 모든것이 불분명한 느낌이 든다. 육체와 정신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사람들의 계산법도 맘에 안들거니와, 내가 탄호이저를 부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 볼프람의 길을 가는 것처럼, 외부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는거고.
더구나 쾌락과 희생의 구분은 분명해보이면서도 분명하지 않다.
사실 탄호이저는 아주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베네스부르크에 찾아갔으면서도 결국은 엘리자벳으로 돌아왔고,
두 곳의 여행을 통해서 비록 갈등을 했을 지언정 얻을 건 다 얻었으니까.
누구나 자신이 운이 좋은 사람이길 원하지 않나? 나도 그렇고. - May 30, 2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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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January 14, 2008
시시껄렁한 일상얘기 01/14/08
1. 신년사
2008년이 시작하면서 싸이에 '신년사'라는 제목과 함께 본문은 달랑 '새해 따위...' 한마디인 글을 올렸었다. 그걸 두고 많은 사람이 "낚였다", "내가 왜 기대하면서 클릭했을까" 등등의 반응을 보였고 친누나마저 "나 참 어이가 없어서"류의 반응을 보였다. 사실 1월 8일이 지날 즈음에 '생일을 맞이하여'라는 제목으로 '생일 따위...'라는 본문을 가진 글도 쓸까 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생일인거 홍보하는 거 같아서 관뒀었다.
하여간 말하자면 낚시의 의도는 전혀 없었다;; 나름 진지하게 쓴건데. 예전에도 비슷한 식의 신년사를 쓴 적이 있었는데 나는 사실 사람이 '스스로 숫자의 체계와 시간의 단위를 만들어 놓고 아무 시점을 원점으로 잡고 시간을 잰 다음, 그것의 정수부분의 digit이 바뀌는 순간을 즐긴다'라는 것이 너무나 웃기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년'이라는 시간의 단위에는 '지구가 태양을 한바퀴 돈다'라는 physical meaning이 들어있긴 하지만 여전히, not very convincing. 생일도 마찬가지이다. 생일 축하를 해주는 분들이 있으니, 또 그분들은 나를 좋아하는 마음에 해주는 것이니 정말 진심으로 감사하긴 하지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2. 까마귀
아침에 보니 대충 봐서 300~500마리정도 되는 까마귀 떼가 집 뒤 나무 다섯그루에 나누어 쉬고 있었다. 까악까악 대면서 말이다. 작년 덴번로 APS가는 비행기 타기 전날 비슷한 광경을 본 적이 있었는데 이맘때쯤이면 출몰하는 녀석들인거 같다. 까마귀가 사람들 사이에서 별로 환영받는 새는 아닌거 같긴 한데 나는 까마귀 떼를 보기 전까지는 아무 느낌 없었다. 까마귀를 '떼'로 본 적도 없거니와, 서울 도심에서는 한마리 보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려나? 하여간, 까마귀 떼를 직접 보고 나니, 여전히 까마귀가 싫거나 흉함의 전조라고 생각되거나 하지는 않지만, 왜 사람들이 기피하는 새가 되었는지 이해는 간다. 그냥 시끄럽고, 우는 소리가 별로 유쾌한 소리는 아닌 거 같다. 아주 절실하게 '까아아아악'하는데 사람으로 따지자면 통곡 소리 같다.
3. 시차적응
한국에서 돌아온 이후로 아직도 시차적응을 못하고 있다. 밤 11시만 되면 졸리기 시작해서 밤 12시면 침대로 가야하고, 아침 4~5시가 되면 눈이 떠져서 억지로 눈을 감고 반쯤 자는 것처럼 6시까지 버티다 일어나는 생활을 한국에서 돌아온 이후로 매일 반복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이 나는 보통 6시간 자는 것을 기본으로 생활해왔는데, 수면시간이 평소(새벽 3시 반)보다 앞당겨지니까 호르몬 순환이 잘되는 것인지, 4~5시간 정도로 수면시간이 줄어드는 거 같다. 그래서 시차적응에 대한 열망이 좀 적은 편이다. 3시 반쯤 잘 때는 약간 불면증 끼도 있어서 잠 안와서 뒤척이다 보면 해뜨고 그런 적도 있었는데, 당장 시차 부적응 상태가 좋은 것도 같아 당분간 크게 노력 안하려고.
4. 최근에 지름들
최근에 타겟에서 10인치 디스플레이가 달린 DVD플레이어를 100불에 팔길래 질렀다. J누나가 아틀란타로 가면서 무겁다고 우리집에 버리고 간 29인치 TV에 연결해서 DVD를 보려니 화면도 볼만하고 좋다. 다만 볼 DVD가 없다는 것. 사실 DVD야 블록버스터 가서 빌려오면 되는데, 문제는 같이 볼 사람이 없다.
또 아주 훌륭한 분께서 생일 선물로 newegg.com 100불 상품권(!)을 선물로 주시는 바람에 GPS를 하나 질렀다. 평소에 'GPS를 쓰는 것은 지는거다...'라는 신념이 있어서 지름을 결정하기 쉽지 않았다. 일단 지르게 되었으니 쓰긴 해야할텐데 등하교길에 쓸 수는 없고 아무래도 어디 새로운 곳을 놀러가거나 할 때 사용해야 할 거고, 그런데를 가려면 같이 갈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이거 문제다. 차는 있고 GPS도 있고 갈 곳을 생각해낼 수는 있으나 같이 갈 사람이 없다. 그리하여,
5. 여자친구 모집 -_-
최근에 내가 어떤 여자를 좋아하는 지 잘 생각해봤다. 일단
- 내가 안았을 때 품 속에 쏙 들어오는 여자: 키 165cm미만의 귀여운 외모, 발목이 예쁘면 금상첨화!
- 나와 취미가 같으면 좋겠고: 바흐를 즐겨 들을 필요까지는 없으나 클래식에 최소한의 관심은 있었으면 좋겠고 악기를 한다면 더더욱 좋다.
- 수준있는 지식이 있었으면 좋겠다: 여자친구한테 무언가를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학벌은 상관없는데 다만 조교질 오래하고 그러니까 학부 졸업한 정도의 지식은 뭐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으니 최소한 대학 졸업하고 현업에 2년 이상 근무나 석사학위 이상인 지식이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 temper가 온유하고, 지나치게 종교적이지 않으며, '논리 역시 하나의 믿음의 영역이다'라는 주장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고, 윤리적이지 않지만 사랑을 믿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무엇보다 첫번째 조건이 중요하니 주변에 자신이 그러하다고 생각하거나 그러한 분을 아는 분들은 연락을...;;
사실 앞 내용들은 농담인 부분도 있고 아닌 부분도 있는데, 아무래도 여자친구를 찾는다거나 하는 타게팅을 하고 사람을 만나는 건 더구나 유학생 사회에서 적절하진 않은 듯 하고, 다만 예전보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에 대해 적극적이 되어볼까 한다.
IK
P.S. 아침에 시간이 많아진 고로 요리를 좀 하려고 하고 있다. 오늘은 짜장을 했다. 내일 아침에 밥해서 도시락으로 싸가야지. 그래도 여전히 많이 남으니 피츠버그에 계신 분 중에서 배고프신 분들은 따로 연락을... 이번에도 귀여운 여성분 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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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January 13, 2008
현악기에 대한 단상
오늘 동아리(KAIST Orch) 싸이 클럽에 들어갔다가 누군가가 올려놓은 'Goldberg Variation 현악 삼중주 버젼'을 보게 되었다. 일단 아래 링크하고,
아래는 글렌 굴드가 친 피아노 버젼이다.
내가 이것을 보고 하고 싶은 이야기는 현악기가 keyboard에 비하여 얼마나 제한적인 악기냐는 것이다. 혹은 반대로 keyboard가 현악기나 관악기에 비해서 얼마나 편리한 악기냐는 것이다.
내 생각에,
현악기의 가장 근본적인 난점은 현의 개수가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88개의 건반과 그에 해당하는 현들을 가지고 있는 피아노와 달리 바이올린은 5도 차이로 조율된 달랑 4개의 줄을 이용해서 연주를 해야 한다. 당연히 피아노에 비해서 음역이 제한되고 바로크 시대에 사용되었다는 'curved bow'를 사용한다 해도 동시에 4개 이상의 음을 낼 수 없다. 4개의 음을 동시에 낼 수 있다 해도 '활'이라는 단일건반을 사용하는 현악기는 음 각각의 박자를 독립적으로 낼 수 없다. 그러므로 현악기는 기본적으로 단성악기로 취급되어야 옳다.
저기 삼중주로 편곡된 곡 중에 제일 앞에 나오는 26번 변주의 경우는 멜로디가 두개 존재하는 이성음악으로 봐야 하지만 현악 삼주주의 연주를 들으면 상당히 버겁다. 피아노로는 매우 깔끔하게 연주된다는 점과 상당히 비교된다. 물론 이 곡의 대가인 글렌 굴드의 연주와 비교하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지만 현악 삼중주 팀의 멤버 역시 명성으로는 뒤지지 않을 사람들이다.
하여간 바이올린을 오래 하면서 느끼는 것은 5도 간격으로 조율된 4개의 현을 가진 악기로 무언가를 연주하기 쉬운 곡이 있고 그렇지 않은 곡이 있다는 것이다.
일단 가용손가락이 네개이고(바이올린의 구조상 엄지손가락을 사용해 연주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게 때문에 현은 5도 간격이며, 또 그렇기 때문에 몇몇 연주하기 어려운 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A5음과 B5음을 동시에 잡는 화음 코드의 경우 4번가락으로 D현을 잡고 1번 손가락으로 A현을 잡아줘야 한다. 사실 아주 어려운 코드라기 보다 빨리 연주하기에는 부담되는 코드다. 또한 한옥타브가 넘어가는 화음은 거의 잡기 불가능하다. 일반적인 손 크기를 가진 사람이 부담없이 잡을 수 있는 음이 한옥타브까지이기 때문에 한옥타브를 넘는 음의 점프를 부드럽게 연주하는 것도 부담스럽다. 건반을 누르면 균일한 소리가 나는 피아노와는 달리 현악기들은 왼손으로 현을 눌러주는 압력에도 음색이 영향을 받기 때문에 새끼손가락을 많이 사용해야하는 곡들은 부담이 따른다. 장 3도 화음이나 장3도를 넘나드는 빠른 스케일이 특히 그렇다. 이런 건 현을 바꾸기에는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새끼손가락을 사용하기에도 불안하고, 뭐 그렇다.
반면 화음이 아무리 많아도 그게 6도 차이거자, 7도 차이(잘 쓰이진 않지만)라면 연주하기 매우 쉽다. 장5도는 어렵다. 한 현의 간격이 장5도 차이이기 때문에 이를 연주하려면 한 손가락을 두 개의 현에 동사에 포개놔야 하는데, 이게 연주하는 스타일에 따라 어려운 경우가 있다. 특히 나처럼 왼손을 뉘여 연주하는 경우는 특히 그렇다.
(여기에 대해 첨언하자면 왼손을 쓰는 방식에는 크게 두가지가 있다. 하이페츠처럼 손가락을 꽂꽂히 세워서 현을 위에서 '내려찍은' 방법과, 아이작 스턴처럼 옆에서 뉘이는 방법이 있다. 사실 내려찍는 방법이 음정이 더 깨끗하고 자질구레한 소리가 덜 나긴 하지만, 손가락이 짧다면 뉘일 수밖에 없다. 뉘이는게 약간 더 빠른 연주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디고 하다. 나는 새끼손가락이 보통보다 짧은데다 휘어져 있어서 내려찍은 방법은 전혀 사용하지 못한다.)
하여간 정리하자면,
쉬움: 6도, 7도,
까다로움: 2도, 3도, 5도, 8도 이상
그래서 악보를 처음 봤을 때 아무리 화음이 많아도 6,7도가 많으면 쉬운 악보로 분류하고, 2도, 3도 등이 많으면 매우 까다로운 악보로 생각한다.
그래서 처음의 Goldberg variation으로 돌아가자면, 피아노는 각각의 음이 각각의 건반을 가지고 있고 두 손을 사용하기 때문에 동시에 연주할 수 있는 음의 범위와 갯수가 상당히 넓고 많다. 반면 현악기의 경우 자주 쓰이는 화음 중에서는 장6도 화음만이 (약한) 새끼손가락 없이 연주가 가능하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다성음악을 연주하기에는 상당히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이자이나 바흐의 소나타/파르티타 들이 멜로디의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곡으로 취급받는 이유가 다성 푸가가 그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사실 뻔한 애긴데 저 현악삼중주 연주 보고 그냥 써보고 싶어서 써봤다. -_-
IK
P.S. 저 삼중주 관련 검색어로 검색하면 다른 변주들도 다 나온다. 다 보고나니 연주하고 싶어졌다. -_- 누구 같이 할 사람 없나? 나는 바이올린 아니면 비올라 커버 가능. 피츠버그 있는 분 혹시 있음 연락주시길...
2/12편 보면 2분 40초쯤에서 5번 변주 시작되는데 이거 내가 젤 좋아하는 변주다. 멋지다. =_=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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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January 09, 2008
A Simple Model
지난 크리스마스이브에 비행기를 타지 못한 이후로, 하루나 이틀 동안 왜 아무도 미리 다음날 비행기를 자원하지 않았을 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만약에 우리가 이 상황을 간단한 게임이론의 모델로서 구축할 수 있고 payoff table을 만들 수 있으며, 그에 따라 'involuntary strategy'가 Nash's equilibrium에 있다면 왜 그랬는지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까지는 그날까지의 감상이고, 사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Freakonomics'라는 책을 읽으면서 왔는데 그 책의 저자의 관점에 들어있는 ‘인센티브’의 개념으로도 대충 설명이 가능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날까지의 감상으로 이 글은 한정하겠음.)
그래서 모델은 이렇다. N명의 사람들이 비행기를 타려 기다리고 있고, M개의 자리가 있다. N>M의 상황만을 고려하며, 그에 따라 N-M명의 사람이 비행기를 탈 수 없다. 실제 상황에서는 각 승객의 fare class가 있어서 우선순위라는 것이 존재하지만, 간단한 모델을 만들기 위해서 그런 것을 무시한다. 누가 제외될 지의 선택은 무작위로 결정된다. 다시 말해 M보다 작은 V명이 자원을 했을 때, 자원하지 않은 사람이 비행기를 타지 못할 확률은 (N-V-M)/(N-V)가 된다.
그리고 V>M일 경우 약간 복잡해지는데, M/V의 확률로 비행기를 타지 않게 되겠지만, (V-M)/V의 확률로 비행기를 타게 된다. V>(N-M)일 확률을 a라고 하자. 사실 a는 payoff의 함수이고 payoff는 a의 함수가 되기 때문에 recursive function이 되는데, 현실적으로 웬만하면 a는 0에 가까울 거 같다. 하지만 우리가 가정하는 상황 자체가 V>0인 상황이기 때문에 a를 함부로 0으로 놓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payoff를 도입하자면, 어떤 사람이 자원해서 비행기를 타지 않았을 경우 R(Reward)이라는 보상을 받겠지만 T(Timeliness)만큼을 얻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이 자원하지 않았지만 비행기를 타지 못할 경우는 C(Compensation)라는 보상을 받고 T를 잃게 된다. 비행기를 타게 되면 T를 얻게 된다.
정리하자면, 어떤 사람이 자원한다면,
1) a의 확률로 '잉여 자원자‘가 생기게 되고, 이 경우
1.1) (V-M)/V로 T 획득
1.2) M/V로 (R-T) 획득
2) (1-a)의 확률로 (R-T)획득
고로 P(voluntary)=aT(V-M)/V+aM(R-T)/V+(1-a)(R-T)
어떤 사람이 자원하지 않는다면,
1) a의 확률로 무조건 비행기 탐: T 획득
2) (1-a)의 확률로 추첨돌입, 이 경우
2.1) (N-V-M)/(N-V)로 탑승 실패: (C-T) 획득
2.2) M/(N-V)로 비행기 탑승: T 획득
고로 P(involuntary)=aT+(1-a)(N-V-M)(C-T)/(N-V)+(1-a)MT/(N-V)
정리하면,
P(voluntary)=(1-a)(R-T)+a(TV+MR-2TM)/V
P(involuntary)=aT+(1-a)(NC-VC-MC-TN+TV+2TM)/(N-V)
N과 M은 상황에 따라 주어지는 parameters고, C와 R은 항공사가 규정에 정한 constants이다. T는 개개인의 상황에 따라 달리 주어지는 parameter이고 a와 함께 상황을 복잡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voluntary, involuntary 두 경우 모두 a와 V의 함수가 되고, a도 역시 V의 함수이므로 비선형 항이 되겠다. 하여간 P(v)와 P(i)를 모두 V의 함수로 그렸을 때 V와 상관없이 P(i)>P(v)가 되는 parameter set이 존재한다면 그때가 모두 양보하지 않는 Nash's equilibrium이 될 것이다. 대충 봐서 R=C=2T, a=0의 경우 P(v)=T, P(i)=T가 되어 두 경우의 기대값이 같게 나타난다. 당연한 결과지만. 만약 R < C 이라면 Nash equilibrium이 거의 되지 않을까 생각. 잘 읽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아마 항공사 규정에 involuntary case가 더 보상이 컸던 거 같다.
더 이상 자세한 생각이나 시뮬레이션은 UA가 알아서 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럼 이만.
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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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January 09,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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